사회

‘위안부’ 역사와 싸운 영웅 길원옥 할머니 별세

길원옥 할머니는 1940년 평안남도 평양에서 태어나 12살의 나이에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중국으로 떠났고, 일본군의 강제동원으로 ‘위안부’가 되었다. 당시 그녀는 ‘공장에 취업시켜준다’는 말을 믿고 떠났으나, 일본군에게 끔찍한 고통을 겪게 되었다. 전쟁과 분단으로 고향에 돌아갈 수 없었던 길 할머니는 이후 인천에 정착하며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그럼에도 그녀의 내면에는 일본군에 의한 참혹한 기억들이 깊게 남아 있었다. 1998년, 길 할머니는 우연히 TV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다루는 방송을 보고, 자신이 겪은 고통을 세상에 알리기로 결심했다. 이로써 그녀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로 정부에 신고하며, 2002년까지 자신의 과거를 숨기며 살았던 그녀의 삶은 전환점을 맞이했다.

 

길 할머니는 피해자로서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두려웠으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점차 변화했다. 수요시위에 참여하면서 일본 정부에 사죄와 배상을 요구했고, 이 과정을 통해 자신이 당한 일이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 오히려 일본 정부가 부끄러워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또한 길 할머니는 여성인권운동가이자 평화운동가로서 활동을 이어갔다. 일본, 스위스, 미국 등 해외에서도 증언을 통해 일본군 ‘위안부’의 진상과 그들의 고통을 알리고, 피해자들의 권리를 회복하기 위한 활동에 앞장섰다. 

 

2017년, 길 할머니는 평화와 통일을 위해 헌신하는 여성운동가를 발굴·지원하는 ‘길원옥여성평화상’을 제정했으며, 이는 그녀가 여성운동에 끼친 영향력을 반영한 중요한 사업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와 같은 활동을 통해 길 할머니는 단순한 피해자가 아닌, 강력한 여성인권운동가로서의 자리를 확립했다.

 

 

 

길 할머니는 17일 오후 인천 연수구 인천적십자병원 장례식장에서 빈소가 마련되었으며, 고인을 기억하는 시민들의 조문 행렬이 이어졌다. 고인을 기억하는 이들은 길 할머니를 “강인하고도 따뜻한 여성인권운동가”로 묘사했다. 송애나 ‘호주 위안부 피해자를 위한 친구모임’ 공동설립자는 고인이 고통스러운 기억을 소환할 때마다 해맑은 웃음을 지었던 모습이 떠오른다고 회상하며, 길 할머니의 평화 강조와 전쟁 중 여성에 대한 폭력 문제 해결에 대한 메시지를 언급했다. 또한, 송애나씨는 길 할머니가 세계 각국에서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기여한 공로를 기억하며, 고인의 영향력은 한국을 넘어 해외에도 계속해서 남을 것이라고 전했다.

 

류지형 정의기억연대 연대운동국 팀장은 길 할머니가 김복동 할머니와 함께 ‘평화의 우리 집’에서 활동하며, 두 분이 함께 일본 정부를 향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과정에서 길 할머니가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고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모습을 기억했다고 전했다. 길 할머니는 증언 중에도 가끔 농담을 하며 긴장감을 풀고, 힘든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그녀의 활발한 활동과 긍정적인 모습은 많은 이들에게 큰 힘이 되었고, 그녀가 부른 노래는 그녀의 시련을 잊게 해주는 하나의 방법이기도 했다.

 

전국 대학생 연합동아리 평화나비네트워크는 길 할머니의 빈소에 찾아와 추모의 뜻을 전했다. 이들은 “할머니의 노래가 끊이지 않도록 그 뜻을 이어가겠다”는 다짐을 함께하며, 할머니의 용기와 헌신을 기억하겠다고 말했다. 김윤덕(31)씨는 대학 시절 길 할머니와 자주 시위에서 함께 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길 할머니가 시위에 참여하는 대학생들을 예뻐해 주었고 응원해주었던 따뜻한 마음을 회상했다. 또, 그녀가 고향 땅을 다시 밟지 못하고 떠나야 했던 아픔에 대해 깊은 안타까움을 표했다.

 

길 할머니의 동료이자 오랜 친구인 이용수 할머니는 길 할머니의 별세 소식을 접하고 깊은 슬픔을 표현했다. 두 사람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 문제 해결을 위한 활동을 함께 펼쳤고, 이용수 할머니는 길 할머니의 장례를 간소하게 치러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녀는 일본 정부에 대한 비판을 이어가며,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이 법적 배상을 받기 전에는 이러한 장례를 치를 수 없다고 주장했다.

 

길 할머니의 발인은 18일 오전 9시 30분에 인천적십자병원에서 거행된다. 또한, 정의기억연대는 길 할머니의 뜻을 기리기 위해 19일 수요시위를 추모 집회 형태로 진행할 예정이다. 길 할머니는 끝까지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싸운 인권운동가로, 그 고귀한 삶은 후세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고령, '대가야' 위상 되찾다… 21년 만에 고도 지정

안"을 공포하며 '고령 대가야'를 신규 고도로 공식 지정했다고 밝혔다. 이는 우리나라에서 새로운 고도가 지정된 것은 2004년 이후 21년 만이다.이번 고도 지정은 지난해 7월 문화재청 고도보존육성중앙심의위원회의 지정 의결에 이은 후속 조치로, '고령 대가야'는 기존 경주, 부여, 공주, 익산에 이어 다섯 번째 고도로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문화재청은 '고령 대가야'가  5세기 후반까지 현재의 고령을 넘어 합천, 거창, 함양 등 넓은 지역을 아우르며 고구려, 백제, 신라와 어깨를 나란히 했던 강력한 고대 국가 '대가야'의 중심지였음을 강조했다.실제로 고령에는 대가야의 궁궐터로 추정되는 궁성지와 왕궁 방어시설인 주산성, 당시의 발달된 수로 교통을 보여주는 유적 등 대가야의 위상을 증명하는 다양한 유적이 남아있다. 특히 금관과 '대왕(大王)'명 토기, 토기 가마 등은 대가야가  왕위 세습, 중국식 왕호 사용, 독자적인 예악 문화를 갖춘 중앙집권적 국가였음을 보여준다.'고령 대가야' 지역은 유네스코 세계유산 '가야고분군'에 등재된 '지산동 고분군'을 비롯해 대가야의 역사와 문화를 보여주는 풍부한 유·무형의 문화유산을 간직하고 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문화재청은 이번 고도 지정을 통해 '고령 대가야'의 역사적 가치를 국내외에 널리 알리고, 관광 및 문화산업 활성화를 통해 지역경제 발전에도 기여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고도로 지정되면 주거환경 및 가로경관 개선 사업, 주민참여프로그램 및 주민단체 지원, 세계유산 탐방거점센터 건립, 유적을 활용한 역사문화공간 조성 사업 등 다양한 정부 지원을 받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