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탄핵 심판 선고 임박, 서울 도심에서 찬반 집회로 들썩

19일 서울 도심에서는 윤석열 대통령 탄핵 심판 선고일 발표를 앞두고 찬반 양측의 집회가 계속됐다. 헌법재판소가 선고일을 발표하지 않은 채 심판 결론을 미루고 있는 가운데, 법조계에서는 이번 주 안에 결론이 나려면 선고일 발표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고 전망했다.

 

이날 오전, 윤 대통령의 탄핵을 촉구하는 시민들로 구성된 ‘윤석열 즉각퇴진·사회대개혁 비상행동(비상행동)’은 광화문광장에서 대규모 집회를 진행했다. 이들은 이날을 ‘민주주의 수호의 날’로 정하고, 헌법재판소에 대한 압박을 이어갔다. 집회 참가자들은 “헌재는 빨리 파면 선고하세요”와 “내란수괴 윤석열을 즉각 파면하라”는 문구가 적힌 청록색 띠를 곳곳에 걸었다.

 

특히, 취업준비생 최모(24) 씨는 “앉아서 기다리기만 하는 것보다는 무엇이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해 참여했다”며, “오늘 최소한 선고일이라도 발표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같은 시간, 10·29 이태원 참사 유가족들은 오후 1시 59분에 맞춰 희생자 159명을 기리며 ‘윤석열 파면 기원 159배’를 진행했다. 이정민 이태원참사 유가족협의회 운영위원장은 “윤석열 정부에서 가장 큰 피해를 본 이태원 참사 유가족들은 아직도 윤석열 대통령이 계속해서 대통령직을 수행하는 것에 납득할 수 없다”며 파면을 촉구했다.

 

서십자각 단식 농성장 인근에서는 오전 11시부터 범청년행동과 윤석열퇴진예술행동의 릴레이 시국선언이 진행되었고, 오후 3시경에는 비상행동 공동의장단 15명 중 진영종 참여연대 공동대표와 정영이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회장 등 2명이 건강 악화로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반면, 헌법재판소 건너편에서는 윤석열 대통령을 지지하는 집회도 계속되었다. 대통령국민변호인단은 이날도 오전 9시부터 헌법재판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며 윤 대통령의 탄핵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높였다. 전광훈 목사가 이끄는 자유통일당과 엄마연대 등 탄핵 반대 단체들은 헌재 인근 안국역 5번 출구의 수운회관 부근에서 철야 집회를 이어갔다.

 

이날 오후 2시 30분, 경찰 추산으로 약 300명의 윤석열 대통령 지지자들이 헌법재판소를 향해 탄핵 각하 또는 기각 결정을 촉구했다. 이들은 꽹과리와 심벌즈를 동원해 “탄핵 각하”, “엉터리 탄핵” 등의 구호를 외쳤으며, 이날 오후 3시에는 단식농성 중이던 50대 여성이 건강이 악화되어 병원으로 이송된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헌법재판소 민원실 근처에서는 윤 대통령 지지자들이 각각 3천배와 108배를 올리며 탄핵 각하를 기원하기도 했다. 탄핵반대범국민연합은 오전 11시 종로구 현대건설 앞 인도에서 탄핵 반대 집회를 열고 탑골공원까지 행진했으며, 자유문화국민연합은 오후 2시에 헌법재판소에서 탄핵 심판 각하 결정을 촉구하는 문화콘서트를 개최했다. 자유통일당은 한남동 대통령 관저 인근 볼보빌딩 앞에서 탄핵 반대 집회를 열었으며, 이들 역시 윤 대통령의 탄핵 반대와 각하 결정을 요구했다. 이번 주 내에 결론을 내릴 가능성에 대한 긴장감 속에서, 서울 도심은 계속해서 찬반 집회의 중심이 되고 있다. 헌법재판소의 결정이 임박하면서, 양측의 대립은 더욱 격화될 것으로 보인다.

 

당신이 몰랐던 '항일의 성지'…이 섬에만 365일 태극기가 휘날린다

표지석처럼, 이곳은 인구 2천 명 남짓한 작은 섬에서 무려 89명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저항의 성지다. 분단 이후 '빨갱이 섬'이라는 오명 속에 신음하기도 했지만, 이제는 365일 태극기가 휘날리는 민족의 화산으로 자리 잡은 소안도의 뜨거운 역사는 등대와 학교, 그리고 비석에 고스란히 새겨져 있다.그 저항 정신의 첫 불꽃은 1909년 외딴섬의 등대에서 타올랐다. 동학군 출신 이준하 등 6인은 일본인들이 세운 당사도 등대를 습격해 시설을 파괴하고 일본인들을 살해했다. 이는 단순한 살인이 아니라, 모든 것을 빼앗긴 조선인의 독립 의지를 보여준 상징적 사건이었다. 이로 인해 소안도 주민 2천여 명 중 800명이 일제의 감시 대상인 '불량선인'으로 낙인찍혔지만, 저항은 결코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이 사건은 소안도의 항일 운동에 거대한 불을 지폈다.소안도의 저항은 무력 투쟁에만 그치지 않았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강탈당한 토지 소유권을 되찾기 위해 13년간의 끈질긴 법정 투쟁을 벌여 마침내 승소했다. 주민들은 이를 기념해 1923년 '사립 소안학교'를 세웠다. 이 학교는 단순한 교육기관이 아니라, 민족 교육을 통해 항일 인재를 길러내는 독립운동의 핵심 근거지였다. 교사와 학생들은 비밀결사를 조직하며 항일 운동의 최전선에 섰고, 이는 결국 일제에 의해 강제 폐교되는 비운을 맞았지만, 그 정신만큼은 꺾을 수 없었다.이 모든 투쟁의 중심에는 송내호 같은 뛰어난 지도자가 있었다. 교사였던 그는 무장투쟁 단체를 조직하고 사회주의 사상을 받아들이며 시대의 모순을 해결하고자 했다. 그의 형제 중 셋이 독립운동에 투신했는데, 어머니의 간절한 만류에 순사가 된 막내아들의 묘비에만 유일하게 태극기 문양이 없다는 사실은 시대의 아픔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양반 가문이 없어 신분 갈등이 적었고, 일찍부터 외부 세계에 눈떴으며, 교육열이 높았던 소안도의 독특한 환경은 이 작은 섬이 국내외를 아우르는 강력한 저항의 중심이 될 수 있었던 배경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