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의성 대형 산불, 목격자 '성묘객 번호판 찍고 도망 못 가게 했다'

 경북 의성군에서 발생한 대형 산불의 원인으로 성묘객의 실화 가능성이 제기됐다. 한 마을 주민은 산불 발생 직후 산에서 급히 내려오는 성묘객 무리를 목격했다고 주장했다.

 

23일 한 언론사에 따르면 의성군 안평면 괴산리 야산 정상에서 지난 22일 오전 11시 24분쯤 산불이 발생했다. 괴산1리 마을 주민 A씨는 산불 발생 소식을 듣고 현장으로 향했으며, 오전 11시 55분쯤 불이 난 지점 인근에서 허겁지겁 내려오는 성묘객 무리를 만났다. A씨는 “성묘객들에게 어디 가느냐고 물었지만 대답을 하지 못했다”며 “그들이 타고 온 차량 번호판 등을 사진으로 남기고 경찰에 신고했다”고 밝혔다.

 

경찰은 성묘객들을 상대로 기초 조사를 진행했으며, 불이 난 현장에서 라이터가 발견된 것으로 전해졌다. 의성군 관계자는 “성묘객 중 한 명이 119에 직접 신고하며 ‘묘지를 정리하던 중 불이 났다’고 밝혔다”고 설명했다. 당국은 산불이 완전히 진화되면 정확한 화재 원인을 조사할 예정이다.

 

산불은 강한 바람을 타고 빠르게 확산되었다. A씨는 “현장에 도착했을 때 이미 불길이 걷잡을 수 없이 번진 상태였다”고 말했다. 불은 신월리 방향으로 옮겨붙었고, 헬기 투입 요청이 즉시 이뤄졌다. 인근 양계장을 운영하는 주민 안모씨는 “불길이 양계장 근처까지 번졌으나 소방관들과 함께 진화 작업을 벌여 피해를 막을 수 있었다”고 전했다.

 


산림청과 경북도에 따르면, 24일 오전 6시 30분부터 진화 헬기 59대와 인력 2600명, 장비 377대를 투입해 진화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현재 산불 진화율은 60%로, 산불 영향 구역은 약 6078ha에 달한다. 전체 화선 101㎞ 중 39.8㎞ 구간이 여전히 불길에 휩싸여 있다.

 

이번 산불로 의성군 주민 1554명이 실내체육관 등으로 대피했으며, 94채의 시설 피해가 발생했다. 현재 현장에는 초속 1m 정도의 약한 바람이 불고 있으나, 낮 동안 최대 초속 15m에 이르는 강풍이 예상되어 진화 작업에 어려움이 예상된다.

 

당국은 산불 진화를 최우선으로 하고 있으며, 산불 원인 및 책임 소재를 철저히 조사할 방침이다.

 

당신이 몰랐던 '항일의 성지'…이 섬에만 365일 태극기가 휘날린다

표지석처럼, 이곳은 인구 2천 명 남짓한 작은 섬에서 무려 89명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저항의 성지다. 분단 이후 '빨갱이 섬'이라는 오명 속에 신음하기도 했지만, 이제는 365일 태극기가 휘날리는 민족의 화산으로 자리 잡은 소안도의 뜨거운 역사는 등대와 학교, 그리고 비석에 고스란히 새겨져 있다.그 저항 정신의 첫 불꽃은 1909년 외딴섬의 등대에서 타올랐다. 동학군 출신 이준하 등 6인은 일본인들이 세운 당사도 등대를 습격해 시설을 파괴하고 일본인들을 살해했다. 이는 단순한 살인이 아니라, 모든 것을 빼앗긴 조선인의 독립 의지를 보여준 상징적 사건이었다. 이로 인해 소안도 주민 2천여 명 중 800명이 일제의 감시 대상인 '불량선인'으로 낙인찍혔지만, 저항은 결코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이 사건은 소안도의 항일 운동에 거대한 불을 지폈다.소안도의 저항은 무력 투쟁에만 그치지 않았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강탈당한 토지 소유권을 되찾기 위해 13년간의 끈질긴 법정 투쟁을 벌여 마침내 승소했다. 주민들은 이를 기념해 1923년 '사립 소안학교'를 세웠다. 이 학교는 단순한 교육기관이 아니라, 민족 교육을 통해 항일 인재를 길러내는 독립운동의 핵심 근거지였다. 교사와 학생들은 비밀결사를 조직하며 항일 운동의 최전선에 섰고, 이는 결국 일제에 의해 강제 폐교되는 비운을 맞았지만, 그 정신만큼은 꺾을 수 없었다.이 모든 투쟁의 중심에는 송내호 같은 뛰어난 지도자가 있었다. 교사였던 그는 무장투쟁 단체를 조직하고 사회주의 사상을 받아들이며 시대의 모순을 해결하고자 했다. 그의 형제 중 셋이 독립운동에 투신했는데, 어머니의 간절한 만류에 순사가 된 막내아들의 묘비에만 유일하게 태극기 문양이 없다는 사실은 시대의 아픔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양반 가문이 없어 신분 갈등이 적었고, 일찍부터 외부 세계에 눈떴으며, 교육열이 높았던 소안도의 독특한 환경은 이 작은 섬이 국내외를 아우르는 강력한 저항의 중심이 될 수 있었던 배경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