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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 중 퇴출’ 韓교수, 트럼프 비자 칼날에 강제 귀국

 미국 내 외국인 유학생과 교수진에 대한 비자 단속이 강화되고 있는 가운데, 한국인 교수 한 명이 갑작스럽게 비자가 취소돼 귀국하면서 학기 중 강의를 중단하게 되는 일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미국 내 고등 교육기관을 중심으로 외국인에 대한 비자 정책이 실질적인 타격을 주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주목받고 있다.

 

15일(현지 시간) 텍사스 지역방송인 폭스26휴스턴은 휴스턴대학교 수학과에서 조교수로 재직 중이던 전형선 교수가 지난 13일 학기 도중 갑작스럽게 한국으로 귀국했다고 보도했다. 전 교수는 학교의 온라인 학습관리시스템(LMS)을 통해 학생들에게 “갑작스러운 비자 말소로 인해 신분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해 빠르게 한국으로 돌아가야 했다”며 “이에 따라 더 이상 강의를 계속할 수 없게 됐다”고 알렸다. 그는 이어 “수업을 끝까지 책임지지 못하게 되어 진심으로 사과드린다”며 “여러분과 함께한 시간은 저에게도 큰 기쁨이었다”고 전했다.

 

휴스턴대학교 측은 이번 조치에 대해 “전형선 교수가 최근 타 기관에서 박사과정을 이수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학생 비자가 유효하지 않다는 판단에 따라 취소된 것”이라고 해명했다. 또한 “본교에는 총 146명의 외국인 교수진이 있지만, 비자가 취소된 사례는 전형선 교수가 유일하다”고 덧붙였다.

 

전형선 교수는 2022년 9월부터 2024년 6월까지 오하이오주립대학교에서 박사 후 연구원(Postdoctoral Researcher)으로 활동한 뒤, 2024년 가을학기부터 휴스턴대학교에서 조교수로 재직해왔다. 그의 수업은 현재 다른 교수가 이어받아 학기 말까지 진행 중이다.

 

이와 같은 상황에 대해 휴스턴대학교 학생들은 학교 소셜미디어 커뮤니티인 ‘레딧(Reddit)’을 통해 아쉬움을 표하고 있다. “이런 인재를 잃는 건 대학의 큰 손실”, “너무 훌륭한 교수님이셨다”, “행정부는 지금 고등 교육을 상대로 도대체 무엇을 하는 거냐” 등 전 교수의 갑작스런 퇴장에 대해 유감을 드러내는 댓글들이 이어지고 있다.

 

 

 

전형선 교수의 비자 취소는 최근 미국 트럼프 행정부가 불법 이민자 단속과 반유대주의 대응을 강화하는 가운데 나온 조치 중 하나로 해석된다. 특히 외국인 유학생과 교수, 연구원들에 대한 신분 및 비자 점검이 강화되면서 이와 유사한 사례들이 잇따라 발생하고 있다. 미국 CNN 방송은 최근 소장, 변호사 성명 및 학교 측 발표 등을 분석한 결과, 미국 내 약 90개 대학교에서 600명 이상의 외국인 유학생과 교수진, 연구원들이 비자 취소 등의 불이익을 받은 것으로 파악됐다고 전했다.

 

이러한 움직임은 최근 미국 내에서 불거지고 있는 친팔레스타인 시위와도 무관하지 않다. 특히 트럼프 행정부는 경범죄 전력이 있는 외국인 유학생은 물론, 반이스라엘 정서를 드러낸 시위 참가자들에 대한 추방 및 비자 취소 조치를 취하고 있다. 실제로 지난달에는 컬럼비아대학교에 재학 중인 한국인 학생이 친팔레스타인 시위에 참석했다는 이유로 영주권을 박탈당했고, 이에 대해 해당 학생이 미국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끝에 법원으로부터 일시적인 추방 중단 명령을 받아내는 일도 있었다.

 

이번 전형선 교수 사례 역시 학문적 성과와 교육 기여에도 불구하고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예외 없이 적용된 강경한 비자 정책의 영향을 받았다는 점에서 교육계는 물론 학계 전반에 걸쳐 논란이 확산될 것으로 보인다. 미국 내 유학생과 외국인 교수진은 지금도 여전히 불확실한 신분과 정치적 상황 속에서 불안정한 거주와 활동을 이어가고 있으며, 이러한 사례가 계속된다면 고등 교육기관의 글로벌 경쟁력에도 악영향을 줄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당신이 몰랐던 '항일의 성지'…이 섬에만 365일 태극기가 휘날린다

표지석처럼, 이곳은 인구 2천 명 남짓한 작은 섬에서 무려 89명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저항의 성지다. 분단 이후 '빨갱이 섬'이라는 오명 속에 신음하기도 했지만, 이제는 365일 태극기가 휘날리는 민족의 화산으로 자리 잡은 소안도의 뜨거운 역사는 등대와 학교, 그리고 비석에 고스란히 새겨져 있다.그 저항 정신의 첫 불꽃은 1909년 외딴섬의 등대에서 타올랐다. 동학군 출신 이준하 등 6인은 일본인들이 세운 당사도 등대를 습격해 시설을 파괴하고 일본인들을 살해했다. 이는 단순한 살인이 아니라, 모든 것을 빼앗긴 조선인의 독립 의지를 보여준 상징적 사건이었다. 이로 인해 소안도 주민 2천여 명 중 800명이 일제의 감시 대상인 '불량선인'으로 낙인찍혔지만, 저항은 결코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이 사건은 소안도의 항일 운동에 거대한 불을 지폈다.소안도의 저항은 무력 투쟁에만 그치지 않았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강탈당한 토지 소유권을 되찾기 위해 13년간의 끈질긴 법정 투쟁을 벌여 마침내 승소했다. 주민들은 이를 기념해 1923년 '사립 소안학교'를 세웠다. 이 학교는 단순한 교육기관이 아니라, 민족 교육을 통해 항일 인재를 길러내는 독립운동의 핵심 근거지였다. 교사와 학생들은 비밀결사를 조직하며 항일 운동의 최전선에 섰고, 이는 결국 일제에 의해 강제 폐교되는 비운을 맞았지만, 그 정신만큼은 꺾을 수 없었다.이 모든 투쟁의 중심에는 송내호 같은 뛰어난 지도자가 있었다. 교사였던 그는 무장투쟁 단체를 조직하고 사회주의 사상을 받아들이며 시대의 모순을 해결하고자 했다. 그의 형제 중 셋이 독립운동에 투신했는데, 어머니의 간절한 만류에 순사가 된 막내아들의 묘비에만 유일하게 태극기 문양이 없다는 사실은 시대의 아픔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양반 가문이 없어 신분 갈등이 적었고, 일찍부터 외부 세계에 눈떴으며, 교육열이 높았던 소안도의 독특한 환경은 이 작은 섬이 국내외를 아우르는 강력한 저항의 중심이 될 수 있었던 배경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