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이슈

김상경 개인전, "화산 지대의 붉은 대지" 재탄생

 국내외 낯선 여행지에서 마주친 경이로운 대자연의 숨결을 캔버스 위로 옮겨온 화가 김상경의 새로운 작품들이 대중과 만난다. 서울 강남구 청담동에 자리한 갤러리두는 이달 28일부터 작가의 고유한 예술 세계를 조명하는 개인전 '푸른 숲의 시간'을 개최한다고 밝혔다. 이번 전시는 그동안 작가가 끈질기게 파고들었던 생명의 근원적인 힘과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가치를 시각적으로 풀어낸 최신작들을 위주로 기획되었다.

 

전시장에는 특정 지역의 생태적 특성을 고스란히 간직한 독특한 식물군이 주요 소재로 등장하여 관람객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제주도 특유의 이국적인 정취를 자아내는 하귤 나무와 붉은빛이 선명한 천남성 열매를 비롯해, 태평양 너머 하와이 화산 지대에서 자생하는 희귀 식물인 은검초와 오히아레후아 등이 화폭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 이들은 단순한 풍경의 일부를 넘어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끈질기게 살아남는 강인한 생명력을 상징하는 매개체로 작용한다.

 


작가가 이토록 맹렬하게 자연의 원초적인 에너지에 매료된 결정적인 계기는 십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10년 우연히 방문한 제주도의 거문오름과 따라비오름 일대에서 거센 바닷바람에 몸을 맡긴 채 유연하게 흔들리는 들풀들을 목격한 것이다. 특히 화산 활동으로 형성된 짙은 붉은색 토양과 눈이 시리도록 푸른 하늘이 빚어내는 강렬한 색채 대비는 작가의 뇌리에 깊은 잔상을 남겼고, 이는 훗날 그의 독창적인 화풍을 구축하는 가장 핵심적인 밑거름이 되었다.

 

그날의 강렬한 체험 이후, 작가에게 있어 외부 세계로의 여정은 곧 새로운 창작의 씨앗을 발굴하는 필수적인 의식으로 자리 잡았다. 오로지 그림의 소재를 찾기 위해 짐을 꾸리고 낯선 땅으로 발걸음을 옮길 만큼, 특정한 장소가 품고 있는 고유한 기운과 대자연의 섭리를 탐구하는 과정 자체가 예술 활동의 출발점이 된 셈이다. 제주도를 시작으로 하와이, 뉴질랜드 등 전 세계 곳곳의 화산 지대를 직접 누비며 수집한 풍경들은 붉은 대지가 뿜어내는 뜨거운 생명력으로 캔버스 위에 재탄생했다.

 


완성된 작품 속에는 거대한 식물들뿐만 아니라 어린 소년과 소녀, 까만 깃털의 까마귀, 신비로운 푸른 새, 그리고 친숙한 반려견 등 다양한 생명체들이 함께 등장하여 자연과 인간이 조화롭게 어우러지는 한 편의 동화 같은 서사를 완성한다. 시각적으로는 뜨거운 난색 계열과 차가운 한색 계열을 과감하게 교차시켜 극적인 대비 효과를 노렸으며, 이를 통해 시공간의 경계가 허물어진 듯한 몽환적이고 신비로운 분위기를 연출하여 평면의 화면에 무한한 깊이감을 불어넣었다.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및 동 대학원에서 정통 미술 교육을 이수한 김상경은 이번 청담동 전시를 포함해 지금까지 총 26회에 달하는 개인전을 성공적으로 치러내며 중견 작가로서의 입지를 탄탄히 다져왔다. 그의 수준 높은 작품들은 그 가치를 인정받아 현재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은행을 포함한 국내 유수의 문화 예술 기관에 다수 소장되어 있다. 생명의 에너지가 약동하는 이번 전시는 다가오는 5월 16일까지 관람객들을 맞이한다.

 

러시아 국경 옆 시르케네스, 방공호에 새겨진 320번의 공습

'후르티그루텐'은 1893년부터 해안가 34개 항구를 잇는 노르웨이의 생명선 역할을 해왔다. 산과 피오르가 육로를 차단한 지형적 특성상 바다는 노르웨이인들에게 풍경이기에 앞서 유일한 길이었다. 폭풍우 속에서도 멈추지 않고 항해하는 이 배는 단순한 이동 수단을 넘어 노르웨이 사람들의 국민적 기억을 공유하는 움직이는 박물관과 같다.시르케네스 도심 지하에는 2차 세계대전 당시의 참혹했던 기억을 고스란히 간직한 방공호 '앤더스그로타'가 숨겨져 있다. 독일군의 군사 거점이었던 이 도시는 4년 동안 무려 320차례의 공습을 견뎌내야 했으며, 시민들은 차갑고 축축한 바위 터널 속에서 생사를 넘나드는 시간을 보냈다. 전기도 화장실도 없는 극한의 환경 속에서 아이가 태어나고 노인이 숨을 거두던 이 공간은 이제 역사의 증언자가 되어 방문객들을 맞이한다. 지상의 평화로운 설경 아래 잠든 지하의 상흔은 이 도시가 짊어진 시간의 무게를 실감하게 한다.도시를 벗어나 차로 40분 거리에 있는 네이든 지역에는 국경이 갈라놓은 또 다른 아픔이 남아 있다. '아브 박물관'은 노르웨이와 핀란드, 러시아 접경지에 거주해온 원주민 스콜트 사미족의 문화를 보존하는 최전선이다. 19세기 이후 강대국들의 국경 긋기로 인해 생활권이 세 나라로 찢긴 이들은 가족과 생이별하는 고통을 겪어야 했다. 특히 최근의 국제 정세 악화로 러시아 쪽 동족들과의 교류가 완전히 단절되면서, 이들이 겪는 문화적 고립감과 언어 소멸의 위기는 더욱 깊어지고 있다.사라져가는 스콜트 사미어를 되살리려는 현지의 노력은 눈물겹다. 노르웨이 내에서 이 언어를 일상적으로 구사할 수 있는 인구는 이제 손에 꼽을 정도지만, 박물관의 도슨트들은 수업을 통해 새로운 구사자를 길러내며 언어의 맥을 잇고 있다. 언어는 단순히 소통의 도구를 넘어 한 민족의 정체성과 역사를 담는 그릇이기에, 이들의 수업은 사라진 뿌리를 찾는 고단한 여정과도 같다. 국경이 그어놓은 선을 넘어 언어라는 보이지 않는 끈으로 민족의 영혼을 연결하려는 시도는 계속되고 있다.시르케네스의 여행이 비장미로만 가득한 것은 아니다. 묵직한 역사를 마주한 뒤 바렌츠해에서 갓 잡아 올린 킹크랩을 맛보는 경험은 여행자에게 주어지는 가장 선명한 위로다.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식탁 위에서 여행자들은 방공호의 차가운 공기와 사미어 노래의 애잔함을 되새기며 북극권 항구도시의 매력을 온몸으로 만끽한다. 역사적 상흔과 풍요로운 바다의 혜택이 공존하는 이 독특한 환경은 시르케네스만이 줄 수 있는 특별한 감동의 원천이 된다.노르웨이의 북동쪽 끝에서 마주하는 시간은 풍경을 감상하는 차원을 넘어 인류의 보편적인 고통과 회복의 과정을 목격하는 일이 된다. 바닷길을 통해 이어져 온 사람들의 삶과 전쟁이 남긴 흉터, 그리고 소멸에 저항하는 원주민의 목소리가 한데 어우러져 시르케네스라는 도시의 서사를 완성한다. 여행자들은 이곳에서 북쪽 끝의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보이지 않는 국경 너머로 이어지는 인간의 의지와 문화의 생명력을 다시금 확인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