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이슈

유니버설발레단 '심청' 40주년, K-발레의 저력

 전통적인 가족 형태가 변화하고 유교적 가치관이 희미해진 현대 사회에서도 부모를 향한 자식의 희생이라는 고전적인 서사는 여전히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이달 3일 서울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무대에 오른 유니버설발레단의 창작 발레 '심청' 40주년 기념 공연은 이러한 고전의 변치 않는 생명력을 여실히 증명했다. 1984년 발레단 창단과 함께 기획되어 1986년 국립극장에서 첫선을 보인 이 작품은 지난 40년 동안 전 세계 12개국 40여 개 도시를 순회하며 한국을 대표하는 발레 레퍼토리로 굳건히 자리매김했다.

 

이 작품이 오랜 시간 동안 국경을 초월하여 사랑받을 수 있었던 비결은 대사 없이 오직 무용수들의 섬세한 몸짓과 표정 연기만으로 극적인 서사를 완벽하게 전달한다는 점에 있다. 화려한 발레 기술을 뽐내는 것에 집중하기보다 인물의 내면적인 갈등과 문학적인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데 비중을 둔다. 토슈즈를 신은 무용수들은 눈먼 아버지를 위해 목숨을 바치기로 결심하는 순간부터 거친 풍랑 속으로 뛰어드는 고난, 마침내 극적으로 재회하는 기쁨까지 한국적인 한과 정서를 담아낸 안무로 관객들의 눈물샘을 자극한다.

 


서양의 고전 무용인 클래식 발레에 한국의 대표적인 전통 설화를 접목한 독창적인 시도는 동서양 관객 모두에게 매력적인 경험을 제공한다. 무용수들이 한국 전통 의상의 특징인 긴 한삼을 착용하고 무대에 올라 발레 특유의 우아한 팔 동작과 조화롭게 어우러지는 춤사위를 선보이는 장면은 이 작품의 백미다. 극 중간에는 아예 한국의 전통 탈춤패가 등장하여 발레 무용수들과 함께 역동적이고 해학적인 몸짓을 펼치며 서양 무용과 한국 전통 연희의 경계를 허무는 파격적인 연출을 시도하기도 했다.

 

시각적인 융합뿐만 아니라 청각적인 부분에서도 동서양의 조화가 돋보인다. 궁궐을 배경으로 한 2막에서는 오케스트라의 연주가 잠시 멈추고, 무대 위 악사의 움직임에 맞춰 플루트 독주가 동양적인 선율을 연주하며 국악 특유의 정갈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하프와 트럼펫 같은 서양의 관현악기들이 한국의 전통 가락을 연주하는 이색적인 경험은 관객들에게 색다른 즐거움을 선사한다. 타악기 연주자들은 30여 종의 악기를 동원하여 목탁 소리를 묘사하거나 아리랑 선율을 차용하는 등 한국적인 색채를 극대화하는 데 집중했다.

 


이번 40주년 기념 공연은 출연진의 구성 면에서도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오랫동안 심청 역을 맡아온 발레단의 수석무용수 강미선이 다시 주역으로 나섰으며, 그녀와 호흡을 맞추는 왕 역할에는 은퇴한 엄재용 지도위원이 특별 출연하여 화제를 모았다. 40대 이상의 베테랑 무용수들이 전막 공연을 소화하는 것은 체력적으로 이례적인 일이지만, 이들은 오랜 세월 작품과 함께 호흡하며 쌓아온 깊이 있는 해석력과 탄탄한 기본기를 바탕으로 젊은 무용수들 못지않은 완벽한 무대를 선보였다.

 

전문 발레 무용수가 아닌 중견 연기자 김명수가 심 봉사 역할로 무대에 합류한 점도 눈길을 끈다. 정통 연기자의 합류는 자칫 무용 기술에 매몰될 수 있는 발레 공연에 서사적인 깊이와 감정선의 무게를 한층 더해주는 신선한 시도로 평가받는다. 유니버설발레단 측은 이 작품이 4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무대에서 살아 숨 쉴 수 있었던 것은 시대를 관통하는 보편적인 가족애라는 주제 의식 덕분이라고 분석하며, 앞으로도 지속적인 연구와 수정을 통해 작품의 예술적 완성도를 더욱 끌어올리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벽화마을 원조 동피랑부터 해저터널까지, 통영 골목길 탐방

0여 년 전 학익진으로 왜군을 섬멸했던 격전의 현장이지만, 지금은 가두리 양식장 부표가 점점이 떠 있는 평화로운 바다로 변모했다. 섬 입구의 거북등대를 지나 제승당에 들어서면 삼도수군통제사로서 작전을 지휘하던 장군의 고뇌가 느껴진다. 특히 바다 건너 과녁을 향해 활을 쏘던 한산정은 밀물과 썰물의 차이를 전술에 활용하려 했던 장군의 치밀한 지혜를 엿볼 수 있는 유일무이한 장소다.통영이라는 지명 자체가 '삼도수군통제영'의 줄임말에서 유래했을 만큼, 이 도시는 조선 수군의 총사령부로서 오랜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1604년 현재의 통영항 일대로 본영을 옮긴 통제영은 군사적 요충지를 넘어 나전칠기 등 공예 생산의 중심지로서 지역 경제와 문화를 꽃피웠다. 비록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많은 건물이 소실되었으나, 본관이었던 세병관은 여전히 웅장한 자태로 남아 통영의 뿌리를 증명한다. 통제영의 역사는 통영이 단순한 항구 도시를 넘어 문화적 자부심이 강한 도시로 성장하는 밑거름이 되었다.자연이 빚어낸 한려수도의 비경은 미륵산 정상에서 그 정점을 찍는다. 케이블카를 이용해 손쉽게 오를 수 있는 이곳은 국립공원 100경 중 으뜸으로 꼽히며, 맑은 날에는 지리산 천왕봉과 일본 대마도까지 조망할 수 있는 탁 트인 시야를 제공한다. 전망대 근처의 '귀신 잡는 해병' 표지판은 6.25 전쟁 당시 통영상륙작전의 승전보를 전하던 종군기자의 문구에서 유래했다는 흥미로운 역사적 사실을 전한다. 산 아래로 펼쳐진 섬들의 군무는 왜 이곳이 동양의 나폴리라 불리는지 단번에 납득하게 만든다.통영의 골목길은 예술가들의 영감으로 가득 차 있다. 동쪽 비탈 마을인 동피랑은 철거 위기를 딛고 벽화 마을로 거듭나며 전국적인 관광 명소가 되었고, 서쪽의 서피랑은 유치환과 김춘수 등 문학인들의 감성을 담은 소박한 공간으로 사랑받고 있다. 통영반도와 미륵도를 잇는 동양 최초의 해저터널은 일제 강점기의 아픈 역사와 토목 기술이 공존하는 독특한 공간이다. 바다 밑 13m 아래를 걷다 보면 머리 위로 지나가는 배의 진동이 느껴지는 이색적인 경험을 할 수 있으며, 이는 통영만이 가진 입체적인 매력을 더해준다.예술의 향기는 시내 곳곳에서 파도처럼 밀려온다. 현대 음악의 거장 윤이상과 소설 '토지'의 박경리, '꽃'의 시인 김춘수 등 한국 예술사의 거성들이 모두 통영 출신이다. 특히 화가 이중섭은 피란 시절 통영에서 2년간 머물며 '황소'와 '흰소' 등 불후의 명작들을 남겼는데, 이 시기는 그의 예술 인생에서 가장 찬란했던 르네상스로 평가받는다. 매년 열리는 통영국제음악제와 박경리 기념관, 윤이상 기념관 등은 통영이 왜 '예술가를 낳는 땅'이라 불리는지 그 이유를 명확히 보여주는 문화적 자산들이다.통영 여행의 완성은 오감을 자극하는 미식에 있다. 봄철의 별미인 도다리쑥국은 해풍을 맞고 자란 쑥과 자연산 도다리가 만나 비린 맛 없이 향긋하고 시원한 국물 맛을 자랑한다. 통영 특유의 술 문화인 '다찌'는 정해진 메뉴 없이 그날의 제철 해산물이 상다리가 휘어지도록 차려지는 풍성함의 극치다. 여기에 멍게비빔밥과 충무김밥, 달콤한 꿀빵까지 더해지면 통영의 맛을 온전히 느꼈다고 할 수 있다. 호국과 예술, 그리고 미식이 어우러진 통영의 봄은 이 계절이 다 가기 전에 반드시 경험해야 할 축복과도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