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이슈

K-무비의 저력 입증, 박찬욱부터 나홍진까지 칸의 레드카펫 장악

 제79회 칸 국제영화제가 프랑스 남부의 휴양도시 칸에서 그 화려한 막을 올리며 12일간의 대장정에 돌입했다. 뤼미에르 대극장 앞 레드카펫은 턱시도와 드레스를 갖춰 입은 영화인들의 행렬로 북적였고, 영화의 탄생을 축하하는 열기는 지중해의 햇살만큼이나 뜨거웠다. 올해 칸은 스트리밍 플랫폼의 안락함 대신 극장이라는 공동의 공간에서 함께 호흡하고 논쟁하는 '집단 예술'로서의 영화의 가치를 다시 한번 선언하며, 프랑스 전역 950여 개 영화관에서 개막식을 동시 생중계하는 전례 없는 규모의 실험을 감행했다.

 

이번 영화제의 가장 큰 상징적 장면은 한국 영화계의 거장 박찬욱 감독이 심사위원장 자격으로 무대에 오른 순간이었다. 박 감독은 이름 없이 헌신한 수천 명의 영화 스태프와 그 가족들에게 존경을 표하며, 그들의 갈망을 명심해 공정한 심사를 하겠다는 다짐을 전했다. 티에리 프레모 집행위원장이 한국 영화를 '현대성의 거대한 영토'라고 극찬했듯, 2004년 장르 영화로 칸의 문을 열었던 박 감독이 이제는 세계 영화계의 심판관으로서 무대의 중심에 서게 된 것은 한국 영화의 높아진 위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지난해 단 한 편의 장편 영화도 공식 초청받지 못하며 위기론에 휩싸였던 한국 영화는 올해 완벽한 반전의 서사를 써 내려가고 있다. 나홍진 감독의 신작 '호프'가 박찬욱 감독의 '헤어질 결심' 이후 4년 만에 경쟁 부문에 진출하며 황금종려상을 향한 레이스를 시작했다. 여기에 연상호 감독의 '군체'가 미드나이트 스크리닝 부문에, 정주리 감독의 '도라'가 감독주간에 초청되는 등 한국 영화는 칸의 주요 섹션을 고루 점령하며 전 세계 평단과 관객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다.

 

올해 칸이 선택한 공식 포스터는 리들리 스콧 감독의 고전 '델마와 루이스'의 두 여성이 지평선을 응시하는 장면을 담았다. 이는 영화가 걸어온 길을 축하함과 동시에 앞으로 마주할 과제들을 외면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특히 AI 기술의 급격한 발전과 관람 방식의 변화라는 거대한 파도 속에서, 칸은 '2026년의 영화란 무엇인가'라는 묵직한 질문을 던졌다. 티에리 프레모 위원장은 큰 스크린을 향한 창작자들의 열망이 있는 한 영화의 생명력은 영원할 것이라는 단호한 신념을 피력했다.

 


개막작으로 선정된 피에르 살바도리 감독의 '디 일렉트릭 키스'는 이러한 시대적 불안에 대해 가장 영화적인 방식으로 응답했다. 1928년 파리를 배경으로 가짜 영매와 유령이 등장하는 이 코미디 영화는 허구 속에서 진실을 찾는 영화의 본질을 꿰뚫는다. 사라질지 모른다는 공포를 품은 인간만이 진정한 창조를 해낼 수 있다는 감독의 메시지는, 기술의 시대에 인간의 감정과 불안이 오히려 영화를 지탱하는 가장 강력한 에너지원이 될 수 있음을 시사하며 관객들에게 깊은 울림을 주었다.

 

뤼미에르 대극장의 불이 꺼지고 스크린이 밝아지면서 칸의 열두 날은 본격적인 항해를 시작했다. 허구로 진실을 말하고, 끊임없이 죽음을 선고받으면서도 매번 다른 모습으로 부활하는 영화의 생명력은 올해도 크루아제트 거리를 가득 채우고 있다. 어둠 속에서 타인의 삶을 경험하는 이 경건한 의식은 한국 영화의 화려한 귀환과 함께 2026년 현재 우리에게 영화가 왜 여전히 필요한지를 증명해 보이고 있다.

 

벽화마을 원조 동피랑부터 해저터널까지, 통영 골목길 탐방

0여 년 전 학익진으로 왜군을 섬멸했던 격전의 현장이지만, 지금은 가두리 양식장 부표가 점점이 떠 있는 평화로운 바다로 변모했다. 섬 입구의 거북등대를 지나 제승당에 들어서면 삼도수군통제사로서 작전을 지휘하던 장군의 고뇌가 느껴진다. 특히 바다 건너 과녁을 향해 활을 쏘던 한산정은 밀물과 썰물의 차이를 전술에 활용하려 했던 장군의 치밀한 지혜를 엿볼 수 있는 유일무이한 장소다.통영이라는 지명 자체가 '삼도수군통제영'의 줄임말에서 유래했을 만큼, 이 도시는 조선 수군의 총사령부로서 오랜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1604년 현재의 통영항 일대로 본영을 옮긴 통제영은 군사적 요충지를 넘어 나전칠기 등 공예 생산의 중심지로서 지역 경제와 문화를 꽃피웠다. 비록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많은 건물이 소실되었으나, 본관이었던 세병관은 여전히 웅장한 자태로 남아 통영의 뿌리를 증명한다. 통제영의 역사는 통영이 단순한 항구 도시를 넘어 문화적 자부심이 강한 도시로 성장하는 밑거름이 되었다.자연이 빚어낸 한려수도의 비경은 미륵산 정상에서 그 정점을 찍는다. 케이블카를 이용해 손쉽게 오를 수 있는 이곳은 국립공원 100경 중 으뜸으로 꼽히며, 맑은 날에는 지리산 천왕봉과 일본 대마도까지 조망할 수 있는 탁 트인 시야를 제공한다. 전망대 근처의 '귀신 잡는 해병' 표지판은 6.25 전쟁 당시 통영상륙작전의 승전보를 전하던 종군기자의 문구에서 유래했다는 흥미로운 역사적 사실을 전한다. 산 아래로 펼쳐진 섬들의 군무는 왜 이곳이 동양의 나폴리라 불리는지 단번에 납득하게 만든다.통영의 골목길은 예술가들의 영감으로 가득 차 있다. 동쪽 비탈 마을인 동피랑은 철거 위기를 딛고 벽화 마을로 거듭나며 전국적인 관광 명소가 되었고, 서쪽의 서피랑은 유치환과 김춘수 등 문학인들의 감성을 담은 소박한 공간으로 사랑받고 있다. 통영반도와 미륵도를 잇는 동양 최초의 해저터널은 일제 강점기의 아픈 역사와 토목 기술이 공존하는 독특한 공간이다. 바다 밑 13m 아래를 걷다 보면 머리 위로 지나가는 배의 진동이 느껴지는 이색적인 경험을 할 수 있으며, 이는 통영만이 가진 입체적인 매력을 더해준다.예술의 향기는 시내 곳곳에서 파도처럼 밀려온다. 현대 음악의 거장 윤이상과 소설 '토지'의 박경리, '꽃'의 시인 김춘수 등 한국 예술사의 거성들이 모두 통영 출신이다. 특히 화가 이중섭은 피란 시절 통영에서 2년간 머물며 '황소'와 '흰소' 등 불후의 명작들을 남겼는데, 이 시기는 그의 예술 인생에서 가장 찬란했던 르네상스로 평가받는다. 매년 열리는 통영국제음악제와 박경리 기념관, 윤이상 기념관 등은 통영이 왜 '예술가를 낳는 땅'이라 불리는지 그 이유를 명확히 보여주는 문화적 자산들이다.통영 여행의 완성은 오감을 자극하는 미식에 있다. 봄철의 별미인 도다리쑥국은 해풍을 맞고 자란 쑥과 자연산 도다리가 만나 비린 맛 없이 향긋하고 시원한 국물 맛을 자랑한다. 통영 특유의 술 문화인 '다찌'는 정해진 메뉴 없이 그날의 제철 해산물이 상다리가 휘어지도록 차려지는 풍성함의 극치다. 여기에 멍게비빔밥과 충무김밥, 달콤한 꿀빵까지 더해지면 통영의 맛을 온전히 느꼈다고 할 수 있다. 호국과 예술, 그리고 미식이 어우러진 통영의 봄은 이 계절이 다 가기 전에 반드시 경험해야 할 축복과도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