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이슈

이종구 화백, '농민' 대신 '부처' 그렸다

 누런 양곡 포대 위에 흙먼지 묻은 농민의 얼굴을 새겨 넣으며 시대의 아픔을 증언해온 화가 이종구가 이번에는 고요한 성찰의 세계로 발을 들였다. 서울 소격동 학고재에서 열리고 있는 개인전 ‘사유’는 평생을 현장에서 투쟁하듯 그림을 그려온 노작가가 마주한 삶의 전환점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다. 그는 코로나19라는 전 지구적 재난과 개인적인 투병 생활, 그리고 정년퇴임이라는 신변의 변화를 겪으며 외부로 향했던 시선을 자신의 내면으로 돌리기 시작했다. 이번 전시는 그 결과물로, 농촌의 현실 대신 반가사유상과 좌불상이 화면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두 개의 캔버스를 하나로 결합한 독특한 구조의 연작들을 대거 선보였다. 이는 불교의 ‘불이(不二)’ 사상을 시각적으로 형상화한 것으로, 서로 다른 두 화면이 만나 하나의 서사를 완성한다. 한쪽에는 자비로운 미소의 불상을 배치하고 다른 쪽에는 흐르는 물이나 타오르는 불꽃, 혹은 작가 자신의 자화상을 그려 넣는 방식이다. 이는 삶과 죽음, 인간과 자연이 결코 분리된 것이 아니라 서로 의존하며 순환하는 관계임을 역설한다. 작가는 캔버스를 붙이는 행위 자체가 둘이면서 하나인 존재의 본질을 찾아가는 과정이었다고 설명한다.

 


전시작 중 ‘사유_생로병사2’는 작가가 겪은 고통의 시간을 가장 직설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화면 속에는 환자복을 입고 수액 거치대에 의지한 작가와 말쑥한 정장 차림으로 휴대전화를 든 작가가 나란히 서 있다. 살기 위해 링거 줄을 붙잡았던 병실에서의 사투와 퇴원 후 생계를 위해 휴대전화를 놓지 못하는 일상의 모습은 결국 같은 무게의 삶이라는 깨달음을 전한다. 투병이라는 극한의 상황을 통과하며 작가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어야 할 생로병사의 굴레를 담담한 시선으로 긍정하게 된 것이다.

 

천 년의 세월을 버텨온 고목을 그린 나무 연작 역시 인류 보편의 생로병사를 관조하는 작가의 시선이 닿아 있다. 거대한 나무 아래에는 갓난아이부터 휠체어에 앉은 노인까지 인생의 각 단계를 지나가는 인물들이 배치되어 한 폭의 풍경을 이룬다. 이는 개별적인 삶의 고통 너머에 존재하는 거대한 생명의 흐름을 조명하는 작업이다. 또한 진돗개와 불상을 한 화면에 담아 모든 존재에 불성이 있는지를 묻는 등 선종의 화두를 현대적 회화로 풀어낸 시도들도 눈에 띈다.

 


이종구는 1980년대 민중미술 운동의 핵심 인물로 활동하며 현장의 목소리를 대변해온 투사였다. 스스로를 그림으로 싸우는 사람이라 정의했던 그는 이번 전시를 통해 보다 근본적인 평화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세상이 극단적인 갈등과 전쟁으로 치닫는 이유가 내면의 성찰 부재에 있다고 본 작가는, 모든 인간이 스스로의 마음속에 깃든 부처를 발견할 때 비로소 진정한 화해에 이를 수 있다고 믿는다. 거친 포대 위에서 피어난 그의 예술혼이 이제는 정교한 사실주의 기법을 통해 영성이라는 새로운 영토를 개척하고 있다.

 

중앙대학교 교수와 인천문화재단 대표이사를 역임하며 행정가로서의 삶도 살았던 그는 이제 다시 오롯이 화가로서 노동의 가치를 실천한다. 사진보다 더 정밀한 극사실주의 기법을 고수하는 것은 그림을 그리는 행위 자체가 숭고한 수행이자 노동이라는 그의 철학 때문이다. 국립현대미술관 등 주요 기관에 작품이 소장되고 대통령의 초상화를 그릴 만큼 화업을 인정받았음에도, 그는 여전히 캔버스 앞에서 존재의 의미를 묻고 있다. 삶의 고통을 사유의 기쁨으로 승화시킨 이번 전시는 다음 달 20일까지 이어진다.

 

 

 

버려진 땅의 기적, 동해시 주민들이 만든 '꽃의 성지'

항 인근의 버려진 땅이 화려한 꽃밭으로 재탄생했다. 부곡동 돌담해안숲공원 옆에 위치한 묵호항 제2준설토 적치장이 그 주인공으로, 과거 항만 준설 과정에서 나온 흙을 쌓아두던 유휴부지가 이제는 청보리와 금계국, 양귀비가 어우러진 거대한 꽃의 바다로 변모했다.이 공간의 변신은 동해시가 지난 2023년부터 추진해온 경관 개선 사업의 결실이다. 시는 삭막했던 항만 부지를 시민들의 휴식처로 되돌려주기 위해 단계적인 꽃밭 조성 계획을 수립했다. 초기에는 약 3만 7,000㎡에 달하는 넓은 부지에 핑크뮬리와 코스모스 등 20만 본에 달하는 가을꽃을 심으며 가능성을 확인했다. 이후 관수 시설을 확충하고 산책로를 정비하는 등 인프라를 구축하며 유휴부지를 시민 친화적인 공간으로 탈바꿈시키는 데 주력해 왔다.특히 이번 경관 조성은 해안가라는 지리적 특성을 세심하게 고려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방파제 남쪽 구간의 경우 파도가 들이치는 월파 피해를 방지하기 위해 사업 구역을 유연하게 조정했으며, 기존의 야자매트 길을 최대한 활용해 자연스러운 산책 동선을 확보했다. 또한 행정 주도의 사업에 그치지 않고 부곡동과 발한동 주민자치위원회와 긴밀히 협력함으로써, 주민들이 직접 공간 운영에 참여하는 민관 협력의 모델을 제시했다.올해 초여름의 주인공은 단연 청보리와 야생화들이다. 8,100㎡ 규모의 청보리밭과 1만 9,000㎡의 금계국 군락, 그리고 2,900㎡를 붉게 물들인 양귀비가 조화를 이루며 장관을 연출하고 있다. 하평 바닷가에서 묵호항역으로 이어지는 해안선을 따라 배치된 이 꽃밭은 바닷바람에 일렁이는 보리 물결과 화려한 꽃잎들이 대비를 이루며, 동해안 특유의 시원한 풍광 속에 서정적인 감성을 더하고 있다.동해시는 이번 프로젝트를 통해 도시 이미지 개선과 관광객 유치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겠다는 전략이다. 단순히 꽃을 심는 것에 그치지 않고 계절별로 수종을 교체하여 사계절 내내 볼거리가 끊이지 않는 경관 농업의 거점으로 육성할 계획이다. 묵호항의 근대 산업 유산적 분위기와 화사한 꽃밭이 만들어내는 독특한 대조는 사진 작가들과 젊은 층 사이에서 새로운 출사 명소로 급부상하며 지역 경제 활성화에도 기여하고 있다.유휴 항만 부지의 성공적인 변신은 향후 다른 지역의 방치된 국유지 활용 방식에도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준다. 동해시는 앞으로도 도심 속 방치된 공간들을 발굴해 계절마다 색다른 경관을 선보임으로써 시민들에게는 쾌적한 쉼터를, 관광객들에게는 다시 찾고 싶은 아름다운 도시의 기억을 제공할 방침이다. 묵호항의 꽃바다는 이제 동해시를 대표하는 새로운 관광 지도로 자리매김하며 초여름의 활기를 더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