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이슈

AI 시대의 사진, 구본창이 찾은 '진동'

 인공지능이 단 몇 초 만에 완벽한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시대에 사진의 본질을 묻는 전시가 열렸다. 한국 현대 사진을 대표하는 구본창 작가가 기획하고 8명의 후배 작가가 동참한 '진동하는 사물들'이 지난 9일 서울 소격동 국제갤러리에서 막을 올렸다. 이번 전시는 디지털 보정이나 AI의 도움 없이, 작가가 사물과 마주하며 보낸 시간과 그 과정에서 발견한 존재의 본질을 정물 사진이라는 형식을 통해 보여준다. 기획자인 구본창은 사진이 단순한 기록을 넘어 공예와 같은 예술적 깊이를 지닌 매체임을 이번 전시를 통해 증명하고자 한다.

 

전시의 중심을 잡는 구본창의 '오브제' 연작은 비어 있는 상자들을 통해 부재의 미학을 탐구한다. 내용물이 사라진 뒤 남겨진 안감의 흔적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의 역사를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구본창은 사물 본연의 아름다움은 표면이 아닌 그 이면의 서사에 있음을 강조하며, 관람객들에게 일상의 사물을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볼 것을 권한다. 그가 선택한 빈 상자들은 시간의 흐름 속에 사라진 것들에 대한 애잔한 기록이자 사유의 결과물이다.

 


전통적인 인화 기법을 고수하며 사진에 회화적 질감을 부여한 작업도 눈길을 끈다. 김수강 작가는 '검프린트' 기법을 활용해 돌이나 병 같은 흔한 사물들을 몽환적인 화면으로 재탄생시켰다. 수차례 물감을 바르고 빛을 쬐는 고된 과정을 거치며 사진은 종이 위의 단순한 이미지를 넘어 독특한 물성을 획득한다. 작가는 대상이 자신에게 특별한 표정을 보여줄 때까지 오랫동안 응시하는 인고의 시간을 거쳐 비로소 셔터를 누른다고 설명했다.

 

현대 기술을 활용해 육안으로 보기 힘든 미세한 세계를 극명하게 드러낸 작품도 있다. 김경태 작가는 너트 하나를 수백 장 촬영한 뒤 초점이 가장 선명한 부분만 합성하는 '포커스 스태킹' 기법을 선보였다. 이를 통해 완성된 이미지는 사물의 모든 면이 비현실적으로 선명하게 드러나며, 평소 무심코 지나쳤던 금속 표면의 상처와 무늬를 거대한 풍경처럼 마주하게 한다. 이는 기술이 예술가의 시각을 확장하는 도구로 쓰일 때 어떤 미학적 성취를 이룰 수 있는지 보여주는 사례다.

 


인물 사진으로 대중에게 친숙한 조선희 작가는 과일의 소멸 과정을 통해 죽음의 미학을 고찰했다. 썩어가는 과일을 우주의 행성처럼 묘사한 '플래닛' 연작은 생명이 다한 뒤에도 지속되는 물질의 상태를 조명한다. 조선희는 과일을 단순한 피사체가 아닌 자신과 같은 주체로 상정하고, 인물화를 찍듯 정면에서 응시하며 촬영했다. 이는 죽음을 끝이 아닌 또 다른 형태의 미적 완성으로 바라보는 작가의 철학이 투영된 결과물이다.

 

이 밖에도 설탕 조각을 찍은 구성연, 책거리 형식을 빌려온 박찬우 등 참여 작가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사물이 내뿜는 미세한 진동을 포착해냈다. 구본창은 이번 전시가 AI 이미지와 사진 작품이 혼재된 오늘날, 사진만이 가질 수 있는 시간의 무게와 작가의 사유가 무엇인지 질문을 던지는 자리가 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사물의 본질을 꿰뚫는 9인 작가의 시선은 오는 7월 19일까지 국제갤러리 전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정약용의 500권 저술 산실, 다산초당의 인문학

는 결과가 아니라, 발길 닿는 구간마다 깃든 땅의 역사와 대화하며 천천히 걷는 과정에 있다. 그중에서도 전남 강진을 지나는 남파랑길 83코스는 조선의 대유학자 다산 정약용의 고립과 깊은 사유가 층층이 쌓인 공간으로 여행자들을 이끈다. 약 17.5km에 달하는 이 길의 중심에는 야생 차나무가 무성해 '다산'이라는 별칭으로도 불리는 만덕산이 굳건히 자리하고 있다.강진 유배 시절 다산의 삶은 만덕산 자락의 백련사와 그곳에서 만난 혜장선사와의 인연을 빼놓고 설명할 수 없다. 1805년 봄, 유배객 신분으로 처음 백련사를 찾은 정약용은 주지였던 혜장과 학문적 깊이에 감복하며 신분을 초월한 우정을 쌓기 시작했다. 절망적인 유배 생활 속에서 혜장은 다산에게 지적인 동반자이자 정신적인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1808년 다산이 백련사 인근의 다산초당으로 거처를 옮긴 후 두 사람이 수시로 오갔던 800m의 산길은 오늘날 '우정길'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도보 여행자들에게 진한 감동을 전한다.다산초당은 단청조차 없는 소박한 목조 건물이지만, 그곳에 머문 11년 동안 정약용은 '목민심서'와 '경세유표' 등 500여 권에 달하는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 유배라는 물리적 억압조차 그의 사유의 깊이를 가둘 수 없었음을 증명하듯, 초당 곳곳에는 선비의 여유와 기품이 흐른다. 만덕산 능선에서 내려다보이는 강진만의 풍경은 고독한 유배객의 시선을 넓혀주었을 것이며, 지천에 널린 야생 차나무는 그의 호가 된 '다산'의 유래가 되어 오늘날까지 그 향기를 전하고 있다.강진을 지나 해남으로 발길을 옮기면 달마산 미황사에서 땅끝탑으로 이어지는 남파랑길 90코스가 여행자를 맞이한다. 이 구간의 하이라이트는 기암괴석 사이에 제비집처럼 자리 잡은 도솔암이다. 정유재란 당시 소실되어 400여 년간 빈터로 남아있던 이곳은 2002년 법조 스님의 원력으로 복원되었다. 헬기조차 접근하기 힘든 험지에 암자를 세우기 위해 산 아래에서 자재를 미리 깎고 단청까지 칠해 올라와 조립한 '사전 제작 방식'의 서사는 수행자의 지독한 정진을 짐작하게 한다.한 칸 남짓한 작은 규모의 도솔암은 거대한 바위 성벽에 둘러싸여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곳은 남해의 일출과 서해의 낙조를 한자리에서 감상할 수 있는 천혜의 명당으로, 암자 앞마당에 서면 탁 트인 바다와 달마산의 능선이 한눈에 들어온다. 해무가 밀려오는 날이면 마치 구름바다 위에 떠 있는 신선의 거처와 같은 풍경을 연출하며 보는 이의 넋을 잃게 만든다. 작은 공간 안에 고요와 수행의 서사를 압축해 놓은 도량의 품격은 길 위에서 지친 여행자의 마음을 정화해 주기에 충분하다.코리아둘레길 남도 구간은 이처럼 유학자의 고뇌와 수행자의 원력이 교차하는 인문학적 성지다. 길은 단순히 흙과 돌로 이루어진 통로가 아니라, 시대를 앞서간 인물들이 남긴 사유의 흔적을 따라 걷는 시간 여행의 통로가 된다. 완주라는 목표에 매몰되지 않고 발걸음을 늦출 때 비로소 보이는 풍경들은 우리 국토가 간직한 깊은 서사를 들려준다. 만덕산의 차 향기와 달마산의 바닷바람을 맞으며 걷는 이 여정은 현대인들에게 진정한 휴식과 성찰의 의미가 무엇인지 묵묵히 웅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