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이슈

국제갤러리 메이플소프전, 사진으로 빚은 조각

 미국의 현대 사진 거장 로버트 메이플소프는 생전 동성애와 누드 등 금기시되던 주제를 정면으로 다루며 예술적 검열과 표현의 자유라는 거대한 논쟁의 중심에 섰던 인물이다. 그러나 그가 사후에도 미국을 대표하는 사진작가로 추앙받는 근본적인 이유는 파격적인 소재를 압도하는 완벽한 고전주의적 형식미에 있다. 서울 소격동 국제갤러리에서 오늘 개막한 개인전 '형태의 시학'은 이러한 작가의 예술적 본질에 집중한다. 이번 전시는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논란의 소지가 있는 작품들은 배제하고, 메이플소프 특유의 정제된 조형성과 시각적 언어가 돋보이는 25점의 엄선된 작품을 선보인다.

 

전시의 중심축을 이루는 것은 가로세로 약 137cm에 달하는 대형 젤라틴 흑백 사진 3점이다. 종이에 은 화합물과 젤라틴을 입혀 인화하는 이 기법은 강렬한 흑백의 대비를 통해 피사체의 형태를 극도로 선명하게 부각한다. 특히 작품 '토마스'는 정사각형 프레임 안의 원형 틀 속에 흑인 남성 모델의 누드를 배치하여 팽팽한 긴장감을 자아낸다. 모델의 근육과 골격이 만들어내는 선들은 화면 응축과 확장을 동시에 보여주며, 이는 마치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인체 비례도를 현대적 사진 언어로 재해석한 듯한 인상을 준다.

 


메이플소프는 생전에 사진을 조각을 만드는 완벽한 방법이라고 정의하며, 렌즈를 통해 그리스와 로마 시대 조각상의 비례감과 구성 원리를 구현하고자 했다. 그의 카메라 앞에서 인체는 단순한 살결이 아니라 대리석으로 깎아 만든 입체적인 형상으로 치환된다. 빛과 그림자를 치밀하게 통제하여 얻어낸 결과물은 사진이라는 평면 매체가 가질 수 있는 조형적 한계를 넘어선다. 관람객들은 전시된 작품들을 통해 작가가 추구했던 완벽한 구도와 형태의 구축 과정이 사진을 어떻게 순수 예술의 반열로 끌어올렸는지 확인할 수 있다.

 

꽃을 소재로 한 작품들 역시 메이플소프만의 독특한 시각을 보여준다. 전통적으로 여성성을 상징하는 백합을 담은 '칼라 릴리'는 작가의 렌즈를 거치며 오히려 남성적인 강인함과 수직적 에너지를 연상시키는 형태로 변모한다. 그는 의도적으로 성별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면서 피사체가 가진 순수한 형태적 아름다움에 집중하게 만든다. 꽃의 곡선과 음영은 인체의 근육만큼이나 역동적이며, 이는 작가가 대상을 바라볼 때 성별이나 장르라는 선입견을 배제하고 오로지 조형적 완결성만을 추구했음을 방증한다.

 


전시장 한편에서는 1970년대와 80년대에 핫셀블라드 카메라로 촬영된 흑백 사진들도 만나볼 수 있다. 인물과 풍경, 고전 조각 등 그가 평생에 걸쳐 탐구했던 소재들은 하나같이 정교한 균형미를 자랑한다. 메이플소프의 작업에서 빛은 형태를 드러내는 도구이자 공간을 분할하는 선이 된다. 어둠 속에서 피어오르는 인체의 곡선이나 정물의 단면은 흑백 사진만이 가질 수 있는 깊이감을 극대화하며 관객을 압도한다. 기록으로서의 사진이 아닌, 철저히 계산된 미학적 산물로서의 사진이 지닌 힘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번 전시는 메이플소프를 둘러싼 시대적 논란의 안개를 걷어내고, 그가 사진이라는 매체를 통해 구축하고자 했던 새로운 조형 언어를 마주하게 한다. 국제갤러리는 이번 기획을 통해 문제적 예술가라는 수식어 뒤에 가려진 거장의 진면목을 발견하는 계기가 되길 기대하고 있다. 빛으로 조각을 빚어낸 메이플소프의 정교한 흑백 미학은 오는 7월 19일까지 소격동 무대에서 관객들과 만난다. 사진이 단순한 찰나의 기록을 넘어 영원한 고전의 형태를 얻는 과정은 현대 미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깊은 영감을 선사할 것으로 보인다.

 

 

 

정약용의 500권 저술 산실, 다산초당의 인문학

는 결과가 아니라, 발길 닿는 구간마다 깃든 땅의 역사와 대화하며 천천히 걷는 과정에 있다. 그중에서도 전남 강진을 지나는 남파랑길 83코스는 조선의 대유학자 다산 정약용의 고립과 깊은 사유가 층층이 쌓인 공간으로 여행자들을 이끈다. 약 17.5km에 달하는 이 길의 중심에는 야생 차나무가 무성해 '다산'이라는 별칭으로도 불리는 만덕산이 굳건히 자리하고 있다.강진 유배 시절 다산의 삶은 만덕산 자락의 백련사와 그곳에서 만난 혜장선사와의 인연을 빼놓고 설명할 수 없다. 1805년 봄, 유배객 신분으로 처음 백련사를 찾은 정약용은 주지였던 혜장과 학문적 깊이에 감복하며 신분을 초월한 우정을 쌓기 시작했다. 절망적인 유배 생활 속에서 혜장은 다산에게 지적인 동반자이자 정신적인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1808년 다산이 백련사 인근의 다산초당으로 거처를 옮긴 후 두 사람이 수시로 오갔던 800m의 산길은 오늘날 '우정길'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도보 여행자들에게 진한 감동을 전한다.다산초당은 단청조차 없는 소박한 목조 건물이지만, 그곳에 머문 11년 동안 정약용은 '목민심서'와 '경세유표' 등 500여 권에 달하는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 유배라는 물리적 억압조차 그의 사유의 깊이를 가둘 수 없었음을 증명하듯, 초당 곳곳에는 선비의 여유와 기품이 흐른다. 만덕산 능선에서 내려다보이는 강진만의 풍경은 고독한 유배객의 시선을 넓혀주었을 것이며, 지천에 널린 야생 차나무는 그의 호가 된 '다산'의 유래가 되어 오늘날까지 그 향기를 전하고 있다.강진을 지나 해남으로 발길을 옮기면 달마산 미황사에서 땅끝탑으로 이어지는 남파랑길 90코스가 여행자를 맞이한다. 이 구간의 하이라이트는 기암괴석 사이에 제비집처럼 자리 잡은 도솔암이다. 정유재란 당시 소실되어 400여 년간 빈터로 남아있던 이곳은 2002년 법조 스님의 원력으로 복원되었다. 헬기조차 접근하기 힘든 험지에 암자를 세우기 위해 산 아래에서 자재를 미리 깎고 단청까지 칠해 올라와 조립한 '사전 제작 방식'의 서사는 수행자의 지독한 정진을 짐작하게 한다.한 칸 남짓한 작은 규모의 도솔암은 거대한 바위 성벽에 둘러싸여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곳은 남해의 일출과 서해의 낙조를 한자리에서 감상할 수 있는 천혜의 명당으로, 암자 앞마당에 서면 탁 트인 바다와 달마산의 능선이 한눈에 들어온다. 해무가 밀려오는 날이면 마치 구름바다 위에 떠 있는 신선의 거처와 같은 풍경을 연출하며 보는 이의 넋을 잃게 만든다. 작은 공간 안에 고요와 수행의 서사를 압축해 놓은 도량의 품격은 길 위에서 지친 여행자의 마음을 정화해 주기에 충분하다.코리아둘레길 남도 구간은 이처럼 유학자의 고뇌와 수행자의 원력이 교차하는 인문학적 성지다. 길은 단순히 흙과 돌로 이루어진 통로가 아니라, 시대를 앞서간 인물들이 남긴 사유의 흔적을 따라 걷는 시간 여행의 통로가 된다. 완주라는 목표에 매몰되지 않고 발걸음을 늦출 때 비로소 보이는 풍경들은 우리 국토가 간직한 깊은 서사를 들려준다. 만덕산의 차 향기와 달마산의 바닷바람을 맞으며 걷는 이 여정은 현대인들에게 진정한 휴식과 성찰의 의미가 무엇인지 묵묵히 웅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