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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정보보호협정 꺼낸 한·EU…디지털·에너지 협력도 손잡았다

이재명 대통령이 유럽연합, EU 정상들과의 회담에서 안보·방위 분야 협력을 한층 강화하기로 했다. 한국과 EU는 민감한 안보 정보를 안전하게 주고받기 위한 비밀정보보호협정 체결 협상을 시작하고, 디지털 통상과 에너지, 첨단기술 분야에서도 협력 범위를 넓히기로 했다.

 

이 대통령은 10일 오후 현지시간 벨기에 브뤼셀에서 안토니우 코스타 EU 정상회의 상임의장,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과 정상회담을 진행했다. 회담 뒤 열린 공동언론발표에서 이 대통령은 “양측의 안보·방위 협력을 강화하기 위해 비밀정보보호협정 체결 협상을 개시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비밀정보보호협정은 한국과 EU가 안보·방위 영역에서 다루는 민감한 정보를 안전하게 교환할 수 있도록 하는 기반이 된다. 이 대통령은 국제 정세의 변동성이 커지는 가운데 인도태평양의 안보 환경과 유럽의 안보 상황이 더 이상 별개의 문제가 아니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협정이 빠르게 마무리될 경우 양측 간 정보 공유의 신뢰성과 안정성이 높아지고, 이를 토대로 방위산업과 첨단 연구 분야의 협력도 한층 탄력을 받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 대통령은 한국과 EU가 이미 기본협정, 자유무역협정, 위기관리협정 등을 통해 정치·경제·안보 분야에서 협력의 기반을 다져왔다고 평가했다. 또 양측이 전략적 동반자로서 신뢰를 쌓아온 만큼 앞으로는 안보·방위뿐 아니라 디지털, 첨단기술, 기후변화 대응 등 다양한 분야에서 협력을 심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반도 정세도 회담의 주요 의제였다. 이 대통령은 북핵 문제 해결과 한반도 평화 정착을 위해 EU의 지속적인 지지와 건설적인 역할을 요청했다고 밝혔다. 양측은 한반도와 국제사회의 평화, 안정, 번영을 위해 긴밀히 협력해 나가기로 했다.

 

국제 현안과 관련해서는 중동과 우크라이나 문제가 논의됐다. 이 대통령은 호르무즈 해협의 즉각적인 개방과 선박의 자유로운 통항 보장이 중요하다는 데 양측이 뜻을 같이했다고 밝혔다. 또 우크라이나의 평화 회복과 재건을 위해 한국과 EU가 계속 기여하겠다는 의지도 재확인했다고 설명했다.

 

경제 협력 분야에서는 디지털통상협정 서명이 주요 성과로 제시됐다. 이 대통령은 이번 협정이 안정적인 데이터 비즈니스 환경을 만드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를 통해 한국과 EU 간 디지털 교역이 더 활발해지고, 기업들의 온라인 기반 사업과 데이터 활용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줄 것으로 기대했다.

 

국민 안전을 위한 협력도 강화된다. 양측은 승객 예약자료 전송 협정을 타결했다. 이 대통령은 최근 국제 이동이 늘면서 마약과 총기 등 위해 물품의 밀반입 위험이 커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번 협정으로 한국 관세 당국이 EU 국적 항공사의 승객 예약자료를 입수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마련돼 테러와 마약 등 초국가범죄 예방에 도움이 될 것으로 전망했다.

 


기후와 에너지, 첨단기술 분야에서도 협력 확대가 논의됐다. 양측은 탄소중립과 에너지 전환을 위한 협력을 강화하고, 인공지능과 양자기술 분야의 공동 연구와 연구자 교류를 늘리기로 했다.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은 청정에너지 생산에 초점을 맞추겠다며 해상풍력, 수소, 원자력, 우주 분야 협력을 언급했다. 소형모듈원전, SMR 분야에 대해서도 깊이 있게 논의하겠다고 밝혔다.

 

코스타 EU 정상회의 상임의장은 이번 회담을 양측 관계에서 오래 기억될 이정표라고 평가했다. 이 대통령도 변화하는 국제질서 속에서 공동의 이익을 지키고 양측 국민의 삶에 도움이 되는 실질적 성과를 낸 회담이었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정약용의 500권 저술 산실, 다산초당의 인문학

는 결과가 아니라, 발길 닿는 구간마다 깃든 땅의 역사와 대화하며 천천히 걷는 과정에 있다. 그중에서도 전남 강진을 지나는 남파랑길 83코스는 조선의 대유학자 다산 정약용의 고립과 깊은 사유가 층층이 쌓인 공간으로 여행자들을 이끈다. 약 17.5km에 달하는 이 길의 중심에는 야생 차나무가 무성해 '다산'이라는 별칭으로도 불리는 만덕산이 굳건히 자리하고 있다.강진 유배 시절 다산의 삶은 만덕산 자락의 백련사와 그곳에서 만난 혜장선사와의 인연을 빼놓고 설명할 수 없다. 1805년 봄, 유배객 신분으로 처음 백련사를 찾은 정약용은 주지였던 혜장과 학문적 깊이에 감복하며 신분을 초월한 우정을 쌓기 시작했다. 절망적인 유배 생활 속에서 혜장은 다산에게 지적인 동반자이자 정신적인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1808년 다산이 백련사 인근의 다산초당으로 거처를 옮긴 후 두 사람이 수시로 오갔던 800m의 산길은 오늘날 '우정길'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도보 여행자들에게 진한 감동을 전한다.다산초당은 단청조차 없는 소박한 목조 건물이지만, 그곳에 머문 11년 동안 정약용은 '목민심서'와 '경세유표' 등 500여 권에 달하는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 유배라는 물리적 억압조차 그의 사유의 깊이를 가둘 수 없었음을 증명하듯, 초당 곳곳에는 선비의 여유와 기품이 흐른다. 만덕산 능선에서 내려다보이는 강진만의 풍경은 고독한 유배객의 시선을 넓혀주었을 것이며, 지천에 널린 야생 차나무는 그의 호가 된 '다산'의 유래가 되어 오늘날까지 그 향기를 전하고 있다.강진을 지나 해남으로 발길을 옮기면 달마산 미황사에서 땅끝탑으로 이어지는 남파랑길 90코스가 여행자를 맞이한다. 이 구간의 하이라이트는 기암괴석 사이에 제비집처럼 자리 잡은 도솔암이다. 정유재란 당시 소실되어 400여 년간 빈터로 남아있던 이곳은 2002년 법조 스님의 원력으로 복원되었다. 헬기조차 접근하기 힘든 험지에 암자를 세우기 위해 산 아래에서 자재를 미리 깎고 단청까지 칠해 올라와 조립한 '사전 제작 방식'의 서사는 수행자의 지독한 정진을 짐작하게 한다.한 칸 남짓한 작은 규모의 도솔암은 거대한 바위 성벽에 둘러싸여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곳은 남해의 일출과 서해의 낙조를 한자리에서 감상할 수 있는 천혜의 명당으로, 암자 앞마당에 서면 탁 트인 바다와 달마산의 능선이 한눈에 들어온다. 해무가 밀려오는 날이면 마치 구름바다 위에 떠 있는 신선의 거처와 같은 풍경을 연출하며 보는 이의 넋을 잃게 만든다. 작은 공간 안에 고요와 수행의 서사를 압축해 놓은 도량의 품격은 길 위에서 지친 여행자의 마음을 정화해 주기에 충분하다.코리아둘레길 남도 구간은 이처럼 유학자의 고뇌와 수행자의 원력이 교차하는 인문학적 성지다. 길은 단순히 흙과 돌로 이루어진 통로가 아니라, 시대를 앞서간 인물들이 남긴 사유의 흔적을 따라 걷는 시간 여행의 통로가 된다. 완주라는 목표에 매몰되지 않고 발걸음을 늦출 때 비로소 보이는 풍경들은 우리 국토가 간직한 깊은 서사를 들려준다. 만덕산의 차 향기와 달마산의 바닷바람을 맞으며 걷는 이 여정은 현대인들에게 진정한 휴식과 성찰의 의미가 무엇인지 묵묵히 웅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