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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맨' 김선태, 리센느 '무섭노' 2차 가해 논란

 충주시 홍보맨으로 전국적인 인기를 끌었던 김선태가 야심 차게 준비한 지상파 웹예능이 첫 방송부터 거센 역풍을 맞으며 좌초될 위기에 처했다. 지난 29일 KBS의 유튜브 채널을 통해 공개된 새 프로그램 '돈선태: 성공시대'의 선공개 영상이 발단이 됐다. 공무원직을 내려놓고 본격적인 방송인의 길을 걷기 시작한 김선태는 단독 MC로서 신인 그룹 리센느의 멤버들을 초대해 대화를 나눴으나, 그 과정에서 보여준 경솔한 언행이 시청자들의 공분을 샀다.

 

문제는 게스트인 리센느 원이가 과거 겪었던 특정 용어 사용 논란을 김선태가 직접적으로 언급하며 시작됐다. 당시 원이는 일상적인 사투리 표현이 온라인상에서 정치적 프레임으로 비화하며 큰 심적 고통을 겪은 바 있다. 김선태는 이 예민한 사안을 두고 대중의 비판을 '억지 까기' 수준으로 치부하는가 하면, 게스트에게 논란이 된 말투를 재연해달라는 무리한 요구를 이어갔다. 상처를 치유하기보다 오히려 논란을 자극적인 소재로 소비하며 출연자에 대한 배려 없는 진행을 보였다는 지적이다.

 


제작진의 연출 방식 또한 논란을 키우는 데 한몫했다. 유튜브 영상의 미리보기 화면에 논란이 된 문구를 자극적으로 삽입해 조회수 유도에 이용한 것은 물론, 영상과 전혀 무관한 정치인과 기업인들의 이름을 태그로 대거 노출했다. 이는 공영방송이 운영하는 채널이라고는 믿기 힘든 저급한 마케팅 방식이라는 비판을 피하지 못했다. 시청자들은 제작진이 출연자의 아픔을 보호하기는커녕 논란을 재점화해 화제성만 쫓으려 했다며 거세게 항의했다.

 

비판 여론이 걷잡을 수 없이 확산하자 제작진은 해당 영상을 비공개 처리하고 급기야 채널 자체를 폐쇄하는 초강수를 뒀다. 하지만 성난 민심은 쉽게 가라앉지 않고 있다. 특히 최근 다른 예능 프로그램에서 선배 방송인 장도연이 같은 게스트들을 향해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다"며 따뜻한 격려를 건넸던 모습과 극명하게 대비되면서 김선태의 진행 방식은 더욱 혹독한 평가를 받고 있다. 공무원 시절 보여줬던 재기발랄함이 방송가에서는 독이 되어 돌아왔다는 분석이다.

 


김선태 개인에 대한 실망감도 커지고 있다. 행정 전문가로서 사회적 갈등 구조와 정치적 민감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그가, 신인 아티스트에게 낙인을 찍는 듯한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는 점이 대중에게 큰 충격을 안겼다. 많은 이들은 김선태가 '충주맨'이라는 타이틀이 주는 무게감을 잊고 오로지 자극적인 재미만을 추구하다가 선을 넘었다고 비판하고 있다. 현재 그의 개인 채널에는 방송인으로서의 자질을 의심하는 누리꾼들의 항의 방문이 빗발치고 있다.

 

이번 사태는 공직 사회의 스타가 연예계라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전형적인 '무리수' 사례로 남게 됐다. 성공 신화를 묻겠다는 기획 의도와 달리 첫걸음부터 타인에게 상처를 주는 방식으로 화제를 모으려 했던 시도는 결국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다. 단독 MC로서의 첫 시험대에서 낙제점을 받은 김선태가 이번 논란을 어떻게 수습하고 방송 활동을 이어갈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공영방송 예능의 품격과 진행자의 책임감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남긴 채 프로그램은 시작과 동시에 멈춰 섰다.

 

이도다완의 비밀…임진왜란은 도자기 전쟁

는 야욕으로 이어졌고, 이는 결국 1592년 임진왜란이라는 비극을 초래했다. 하지만 이 전쟁의 이면에는 영토 확장 이상의 목적이 숨어 있었는데, 바로 조선의 독보적인 도자기 기술과 도공들을 확보하려는 문화적 약탈이었다. 당시 일본 지배층 사이에서 불어닥친 다도 열풍은 조선의 분청사기를 단순한 그릇 이상의 전략 자산으로 격상시켰다.전쟁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다도에 깊이 심취해 이를 통치 수단으로 적극 활용한 인물이었다. 그는 다성 센 리큐를 스승으로 모시며 일본만의 독특한 다도 문화를 정립했다. 당시 일본 다도의 핵심은 가루차를 물에 풀어 마시는 말차였는데, 이를 담아내는 그릇인 다완은 차가 쉽게 식지 않도록 크고 묵직해야 했다.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중국산 다기에 반발해 소박하고 정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던 일본 다도계는 조선의 투박한 분청사기에서 그들이 갈구하던 '와비·사비'의 정수를 발견했다.조선에서 막사발로 불리며 백성들이 밥그릇이나 국그릇으로 쓰던 생활 자기는 일본 상인과 무사들의 눈에 최고의 명물로 비쳤다. 완벽한 대칭보다는 비대칭의 자연스러움을, 매끄러움보다는 투박한 질감을 지닌 막사발은 일본 다도가 추구하는 무소유와 평온의 철학에 완벽히 부합했다. 특히 그릇 밑부분에 뭉친 유약의 거친 감촉이 일본도의 손잡이와 유사하다는 점은 사무라이들의 소유욕을 자극했다. 조선의 흔한 흙으로 빚은 그릇이 일본에서는 성 한 채와 바꿀 정도의 귀한 대접을 받게 된 배경이다.실제로 일본 교토 다이도쿠치가 소장한 일본 국보 26호 '이도다완'은 조선의 이름 없는 도공이 만든 막사발이다. 조선의 생활용품이 일본의 국보가 된 이 아이러니한 상황은 임진왜란이 왜 '도자기 전쟁'으로 불리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히데요시는 침공 직후 조선의 유능한 도공들을 잡아오라는 칙령을 내릴 정도로 도자기 기술 확보에 집착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조선 도공이 일본으로 끌려갔고, 찬란했던 분청사기의 맥은 조선 땅에서 끊기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고흥 운암산 서쪽의 운대리 일대는 이러한 분청사기의 황금기를 증언하는 귀중한 유적지다. 이곳에는 청자와 분청사기 가마터 30여 개소가 밀집해 있어 고려에서 조선으로 이어지는 자기 변천사를 한눈에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유약에 그릇을 통째로 담갔다 빼는 '덤벙 분청사기'는 고흥 운대리에서 독보적인 예술적 경지에 올랐다. 꾸밈없는 순백의 미를 자랑하는 덤벙 분청사기는 조선 도자기 미학의 정점으로 평가받으며 오늘날까지도 많은 예술가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임진왜란이라는 거대한 소용돌이 속에서 조선의 분청사기는 한 나라의 국보가 되기도, 한 나라의 기술 단절을 가져오기도 했다. 고흥 운암산의 가마터는 그 찬란했던 예술혼과 전쟁의 상흔을 동시에 품은 채 오늘날 우리 곁에 남아 있다. 400여 년 전 일본 무사들이 성을 내주면서까지 갖고 싶어 했던 조선 막사발의 진정한 가치는, 비대칭의 투박함 속에 담긴 우리 민족의 소박하고도 강인한 생명력에 있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