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예큐브

고지용 "2년 전 이혼, 아들 위해 숨겼다"

 그룹 젝스키스 멤버에서 사업가로 변신해 활동 중인 고지용이 가슴 아픈 가정사를 털어놓았다. 고지용은 최근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이미 2년 전에 아내 허양임과 법적으로 남남이 되었다는 사실을 전격 공개했다. 그동안 이혼 사실을 외부에 알리지 않았던 이유에 대해 그는 아들 승재 군이 부모의 변화된 관계를 충분히 받아들이고 정서적으로 안정된 환경에서 성장할 수 있도록 배려하기 위함이었다고 설명했다. 아이의 혼란을 최소화하기 위해 침묵을 선택했던 아버지로서의 고뇌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고지용에 따르면 현재 아들 승재 군은 부모의 결별 상황을 이해하고 있으며, 양측의 보살핌 속에 안정적으로 생활하고 있다. 고지용은 비록 부부로서의 인연은 끝이 났지만, 아이의 부모로서 서로를 존중하고 응원하는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는 이혼 후에도 공동 양육자로서의 책임감을 다하겠다는 의지로 풀이된다. 대중에게 큰 사랑을 받았던 '승재 아빠'로서의 진정성을 잃지 않으려는 그의 태도에 많은 이들이 격려를 보내고 있다.

 


이러한 소식이 전해지자 전처인 의사 허양임의 개인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도 많은 관심이 쏠리고 있다. 평소 일상을 활발히 공유해온 허양임의 게시물 중 어느 시점부터 고지용의 모습이 사라졌던 점이 뒤늦게 주목받고 있다. 특히 최근 그녀가 공개한 아들 승재 군의 편지는 이혼 사실을 미리 짐작게 하는 단서가 되었다. 해외 스키캠프를 떠난 아들이 엄마에게 보낸 편지에는 아빠에 대한 언급 없이 오직 엄마와 아들 두 사람만의 미래를 약속하는 표현들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편지 속에서 승재 군은 엄마에게 혼자서도 식사를 잘 챙겨 먹으라는 당부와 함께 다음에는 꼭 둘이서 함께 여행을 오자는 메시지를 남겼다. 이에 허양임 역시 '우리 둘의 자리'를 잘 지키겠다는 답변을 남기며 아들에 대한 애틋함을 드러냈다. 당시에는 평범한 모자간의 대화로 여겨졌으나, 고지용의 이혼 발표 이후 이 대화 속에 담긴 '둘'이라는 표현이 세 가족이 아닌 모자 중심의 새로운 가족 형태를 의미했다는 분석이 힘을 얻고 있다.

 


고지용과 허양임은 지난 2013년 백년가약을 맺었으며, 이듬해 아들 승재 군을 얻었다. 이후 KBS2 예능 프로그램 '슈퍼맨이 돌아왔다'에 출연하며 아들의 영특한 모습과 부부의 세련된 일상을 공개해 시청자들의 큰 사랑을 받았다. 방송을 통해 전 국민적인 관심을 받았던 가족이었기에, 이들의 결별 소식은 팬들에게 더욱 큰 충격과 아쉬움으로 다가오고 있다. 하지만 아이를 위해 오랜 시간 비밀을 유지하며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온 두 사람의 선택을 존중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현재 고지용은 사업가로서의 본업에 집중하는 한편, 아들과의 시간을 소중히 여기며 평범한 일상을 보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허양임 또한 의료인으로서의 전문적인 활동과 아들 양육에 매진하며 씩씩하게 삶을 꾸려가고 있다. 비록 한 울타리 안에서의 생활은 멈췄지만, 아들 승재 군을 매개로 한 두 사람의 소통은 계속될 전망이다. 대중은 화려했던 연예인의 삶을 뒤로하고 한 아이의 부모로서 성숙한 이별을 택한 이들에게 따뜻한 시선을 보내고 있다.

 

 

 

이도다완의 비밀…임진왜란은 도자기 전쟁

는 야욕으로 이어졌고, 이는 결국 1592년 임진왜란이라는 비극을 초래했다. 하지만 이 전쟁의 이면에는 영토 확장 이상의 목적이 숨어 있었는데, 바로 조선의 독보적인 도자기 기술과 도공들을 확보하려는 문화적 약탈이었다. 당시 일본 지배층 사이에서 불어닥친 다도 열풍은 조선의 분청사기를 단순한 그릇 이상의 전략 자산으로 격상시켰다.전쟁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다도에 깊이 심취해 이를 통치 수단으로 적극 활용한 인물이었다. 그는 다성 센 리큐를 스승으로 모시며 일본만의 독특한 다도 문화를 정립했다. 당시 일본 다도의 핵심은 가루차를 물에 풀어 마시는 말차였는데, 이를 담아내는 그릇인 다완은 차가 쉽게 식지 않도록 크고 묵직해야 했다.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중국산 다기에 반발해 소박하고 정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던 일본 다도계는 조선의 투박한 분청사기에서 그들이 갈구하던 '와비·사비'의 정수를 발견했다.조선에서 막사발로 불리며 백성들이 밥그릇이나 국그릇으로 쓰던 생활 자기는 일본 상인과 무사들의 눈에 최고의 명물로 비쳤다. 완벽한 대칭보다는 비대칭의 자연스러움을, 매끄러움보다는 투박한 질감을 지닌 막사발은 일본 다도가 추구하는 무소유와 평온의 철학에 완벽히 부합했다. 특히 그릇 밑부분에 뭉친 유약의 거친 감촉이 일본도의 손잡이와 유사하다는 점은 사무라이들의 소유욕을 자극했다. 조선의 흔한 흙으로 빚은 그릇이 일본에서는 성 한 채와 바꿀 정도의 귀한 대접을 받게 된 배경이다.실제로 일본 교토 다이도쿠치가 소장한 일본 국보 26호 '이도다완'은 조선의 이름 없는 도공이 만든 막사발이다. 조선의 생활용품이 일본의 국보가 된 이 아이러니한 상황은 임진왜란이 왜 '도자기 전쟁'으로 불리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히데요시는 침공 직후 조선의 유능한 도공들을 잡아오라는 칙령을 내릴 정도로 도자기 기술 확보에 집착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조선 도공이 일본으로 끌려갔고, 찬란했던 분청사기의 맥은 조선 땅에서 끊기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고흥 운암산 서쪽의 운대리 일대는 이러한 분청사기의 황금기를 증언하는 귀중한 유적지다. 이곳에는 청자와 분청사기 가마터 30여 개소가 밀집해 있어 고려에서 조선으로 이어지는 자기 변천사를 한눈에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유약에 그릇을 통째로 담갔다 빼는 '덤벙 분청사기'는 고흥 운대리에서 독보적인 예술적 경지에 올랐다. 꾸밈없는 순백의 미를 자랑하는 덤벙 분청사기는 조선 도자기 미학의 정점으로 평가받으며 오늘날까지도 많은 예술가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임진왜란이라는 거대한 소용돌이 속에서 조선의 분청사기는 한 나라의 국보가 되기도, 한 나라의 기술 단절을 가져오기도 했다. 고흥 운암산의 가마터는 그 찬란했던 예술혼과 전쟁의 상흔을 동시에 품은 채 오늘날 우리 곁에 남아 있다. 400여 년 전 일본 무사들이 성을 내주면서까지 갖고 싶어 했던 조선 막사발의 진정한 가치는, 비대칭의 투박함 속에 담긴 우리 민족의 소박하고도 강인한 생명력에 있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