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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단 기술로 만나는 대한제국…박물관 새단장

 국립중앙박물관 상설전시관 1층에 위치한 대한제국실이 긴 휴식을 끝내고 30일 문을 열었다. 지난해 특별전 이후 9개월 만에 다시 관객을 맞는 이번 전시는 대한제국을 단순히 몰락해가는 왕조가 아닌, 제국주의의 거센 파고 속에서 주권을 지키려 분투했던 근대 국가로 재해석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박물관 측은 국권 상실이라는 비극적 결말 때문에 그간 과소평가되었던 대한제국의 자주적 노력과 근대화 정책을 유물 65점을 통해 상세히 풀어냈다.

 

전시의 핵심은 조선이 근대 주권국가로 탈바꿈하는 과정에서 피어난 '대한인'이라는 정체성이다. 고종황제가 아관파천 이후 경운궁으로 돌아와 환구단을 세우고 황제국을 선포한 것은 자주권을 대내외에 알리기 위한 결단이었다. 전시장 1부에서는 이를 상징하는 국새 '칙명지보'와 황제 즉위식의 생생한 기록인 '대례의궤' 등을 통해 황제국의 위엄을 보여준다. 특히 7년 만에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낸 고종황제의 어진은 당시의 긴박했던 시대상을 묵직하게 전달한다.

 


2부에서는 행정과 교육, 예술 등 사회 전반에 걸쳐 일어난 근대적 변화상을 다룬다. 서구식 제도를 도입해 국가 시스템을 정비하고, 신문과 잡지를 통해 대중의 의식을 일깨우려 했던 흔적들이 고스란히 담겼다. 전통과 서구적 요소가 절묘하게 어우러진 당시의 예술품들은 대한제국이 지향했던 근대화의 방향성을 시각적으로 증명한다. 이는 대한제국이 외부의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시대적 전환을 준비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들이다.

 

일제의 침략이 본격화되던 시기의 저항과 투쟁은 3부에서 비중 있게 다뤄진다. 을사늑약에 항거해 자결한 민영환의 유물과 안중근 의사가 뤼순 감옥에서 남긴 유묵은 '대한인'으로서의 자부심과 결기를 느끼게 한다. 특히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태극기인 보물 '데니 태극기'는 고종황제가 자신의 외교 고문이었던 데니에게 하사한 것으로, 당시의 복잡했던 국제 정세와 자주 독립을 향한 열망을 동시에 상징하는 유물로 손꼽힌다.

 


이번 개편에서 눈에 띄는 점은 유물과 첨단 기술의 조화다. 투명 OLED와 인공지능, 곡면 스크린 등 최신 디스플레이 기술을 활용한 5종의 영상 콘텐츠는 관람객들이 대한제국의 근대화 과정을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도록 돕는다. 1996년 조선총독부 청사를 철거할 때 발견된 동제 상량문 정초 은판이 이번에 처음으로 일반에 공개된 것도 놓칠 수 없는 관전 포인트다. 이는 과거의 아픈 역사를 딛고 새로운 미래를 조망하려는 전시 의도를 잘 보여준다.

 

유홍준 국립중앙박물관 관장은 대한제국이 스스로 근대를 준비했던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우리 역사의 출발점을 제대로 살피는 중요한 과정이라고 강조했다. 대한제국실의 재단장과 더불어 19세기 조선의 변화상을 담은 조선3실도 새롭게 구성되어, 민초들의 성장과 개항의 움직임을 유기적으로 연결해 보여준다. 이번 전시는 실패한 역사가 아닌, 오늘날 대한민국의 뿌리가 된 치열한 도전의 기록으로서 대한제국을 다시 바라보게 하는 소중한 기회가 될 것이다.

 

이도다완의 비밀…임진왜란은 도자기 전쟁

는 야욕으로 이어졌고, 이는 결국 1592년 임진왜란이라는 비극을 초래했다. 하지만 이 전쟁의 이면에는 영토 확장 이상의 목적이 숨어 있었는데, 바로 조선의 독보적인 도자기 기술과 도공들을 확보하려는 문화적 약탈이었다. 당시 일본 지배층 사이에서 불어닥친 다도 열풍은 조선의 분청사기를 단순한 그릇 이상의 전략 자산으로 격상시켰다.전쟁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다도에 깊이 심취해 이를 통치 수단으로 적극 활용한 인물이었다. 그는 다성 센 리큐를 스승으로 모시며 일본만의 독특한 다도 문화를 정립했다. 당시 일본 다도의 핵심은 가루차를 물에 풀어 마시는 말차였는데, 이를 담아내는 그릇인 다완은 차가 쉽게 식지 않도록 크고 묵직해야 했다.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중국산 다기에 반발해 소박하고 정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던 일본 다도계는 조선의 투박한 분청사기에서 그들이 갈구하던 '와비·사비'의 정수를 발견했다.조선에서 막사발로 불리며 백성들이 밥그릇이나 국그릇으로 쓰던 생활 자기는 일본 상인과 무사들의 눈에 최고의 명물로 비쳤다. 완벽한 대칭보다는 비대칭의 자연스러움을, 매끄러움보다는 투박한 질감을 지닌 막사발은 일본 다도가 추구하는 무소유와 평온의 철학에 완벽히 부합했다. 특히 그릇 밑부분에 뭉친 유약의 거친 감촉이 일본도의 손잡이와 유사하다는 점은 사무라이들의 소유욕을 자극했다. 조선의 흔한 흙으로 빚은 그릇이 일본에서는 성 한 채와 바꿀 정도의 귀한 대접을 받게 된 배경이다.실제로 일본 교토 다이도쿠치가 소장한 일본 국보 26호 '이도다완'은 조선의 이름 없는 도공이 만든 막사발이다. 조선의 생활용품이 일본의 국보가 된 이 아이러니한 상황은 임진왜란이 왜 '도자기 전쟁'으로 불리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히데요시는 침공 직후 조선의 유능한 도공들을 잡아오라는 칙령을 내릴 정도로 도자기 기술 확보에 집착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조선 도공이 일본으로 끌려갔고, 찬란했던 분청사기의 맥은 조선 땅에서 끊기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고흥 운암산 서쪽의 운대리 일대는 이러한 분청사기의 황금기를 증언하는 귀중한 유적지다. 이곳에는 청자와 분청사기 가마터 30여 개소가 밀집해 있어 고려에서 조선으로 이어지는 자기 변천사를 한눈에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유약에 그릇을 통째로 담갔다 빼는 '덤벙 분청사기'는 고흥 운대리에서 독보적인 예술적 경지에 올랐다. 꾸밈없는 순백의 미를 자랑하는 덤벙 분청사기는 조선 도자기 미학의 정점으로 평가받으며 오늘날까지도 많은 예술가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임진왜란이라는 거대한 소용돌이 속에서 조선의 분청사기는 한 나라의 국보가 되기도, 한 나라의 기술 단절을 가져오기도 했다. 고흥 운암산의 가마터는 그 찬란했던 예술혼과 전쟁의 상흔을 동시에 품은 채 오늘날 우리 곁에 남아 있다. 400여 년 전 일본 무사들이 성을 내주면서까지 갖고 싶어 했던 조선 막사발의 진정한 가치는, 비대칭의 투박함 속에 담긴 우리 민족의 소박하고도 강인한 생명력에 있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