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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염에 쌀 농사 붕괴, 일본 식탁 물가 비상

 일본 전역이 연일 40도를 웃도는 극한의 폭염에 직면하면서 인명 사고와 경제적 손실이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나고 있다. 일본 소방청의 최신 집계에 따르면 최근 일주일 동안 열사병 증세로 응급 이송된 인원은 1만 명을 넘어섰으며, 이는 지난해 같은 기간과 비교해 두 배 이상 급증한 수치다. 특히 야외 활동 중 의식을 잃고 사망하는 사례가 잇따르자 일본 기상청은 최고기온 40도 이상인 날을 지칭하는 '혹서일'이라는 새로운 예보 용어를 공식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기존의 폭염 기준을 뛰어넘는 극심한 더위가 일상화되면서 일본 사회의 풍경도 급변하고 있다. 과거 35도 이상의 '폭염일'이 가장 높은 단계였으나, 최근 몇 년 사이 40도를 돌파하는 지역이 속출하자 국민 투표를 거쳐 혹서일이라는 명칭을 도입한 것이다. 설문 과정에서는 무더위에 지친 시민들이 '사우나일'이나 '외출 금지일' 같은 자조 섞인 명칭을 제안할 정도로 열도의 열기는 한계치에 도달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기록적인 고온 현상은 일본 경제의 근간을 흔드는 위험 요소로 부상했다. 특히 건설업과 제조업 현장에서는 열사병으로 인한 노동력 상실이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으며, 연간 손실되는 노동 시간이 수십억 시간에 달한다는 분석이 나왔다. 폭염으로 인해 작업 효율이 급격히 떨어지고 결근자가 속출하면서 기업들의 생산성 저하가 실물 경제에 직접적인 타격을 입히는 실정이다.

 

농축산업계의 비명은 더욱 처절하다. 일본의 자부심인 고시히카리 쌀은 고온으로 인해 알곡이 하얗게 변하는 현상이 나타나며 상품 가치가 급락했고, 농가 수입은 곤두박질쳤다. 축산 농가 역시 더위를 견디지 못한 가축들의 폐사와 생산성 저하로 삼중고를 겪고 있다. 닭들은 산란율이 떨어지고 돼지는 성장이 지연되는 등 식탁 물가 전반에 비상이 걸리면서 서민들의 가계 부담은 더욱 가중되고 있다.

 


소비 시장 역시 폭염의 직격탄을 맞아 급격히 위축되는 모양새다. 전통적인 여름 대목을 누려야 할 유명 관광지들은 낮 시간대 유동 인구가 끊기며 한산한 모습이다. 기온이 일정 수준을 넘어서면 오히려 소비가 줄어든다는 경제 분석처럼, 시민들이 외출을 삼가고 실내에만 머물면서 야외 상권은 고사 위기에 처했다. 시원한 기후로 유명했던 홋카이도조차 이제는 에어컨 없이는 생활이 불가능한 지역으로 변모하며 냉방 가전 시장만 기형적으로 팽창하고 있다.

 

기상 전문가들은 올여름 더위가 8월 초순에 절정에 달할 것으로 내다보며, 주요 도시의 혹서일 일수가 역대 최장 기록을 갈아치울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폭염이 장기화됨에 따라 일본 정부는 전력 수급 관리와 취약 계층 보호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자연재해에 가까운 고온 현상을 막기에는 역부족인 상황이다. 뜨거워진 열도와 대비되게 얼어붙은 내수 경기는 일본 사회가 직면한 새로운 형태의 기후 위기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이도다완의 비밀…임진왜란은 도자기 전쟁

는 야욕으로 이어졌고, 이는 결국 1592년 임진왜란이라는 비극을 초래했다. 하지만 이 전쟁의 이면에는 영토 확장 이상의 목적이 숨어 있었는데, 바로 조선의 독보적인 도자기 기술과 도공들을 확보하려는 문화적 약탈이었다. 당시 일본 지배층 사이에서 불어닥친 다도 열풍은 조선의 분청사기를 단순한 그릇 이상의 전략 자산으로 격상시켰다.전쟁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다도에 깊이 심취해 이를 통치 수단으로 적극 활용한 인물이었다. 그는 다성 센 리큐를 스승으로 모시며 일본만의 독특한 다도 문화를 정립했다. 당시 일본 다도의 핵심은 가루차를 물에 풀어 마시는 말차였는데, 이를 담아내는 그릇인 다완은 차가 쉽게 식지 않도록 크고 묵직해야 했다.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중국산 다기에 반발해 소박하고 정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던 일본 다도계는 조선의 투박한 분청사기에서 그들이 갈구하던 '와비·사비'의 정수를 발견했다.조선에서 막사발로 불리며 백성들이 밥그릇이나 국그릇으로 쓰던 생활 자기는 일본 상인과 무사들의 눈에 최고의 명물로 비쳤다. 완벽한 대칭보다는 비대칭의 자연스러움을, 매끄러움보다는 투박한 질감을 지닌 막사발은 일본 다도가 추구하는 무소유와 평온의 철학에 완벽히 부합했다. 특히 그릇 밑부분에 뭉친 유약의 거친 감촉이 일본도의 손잡이와 유사하다는 점은 사무라이들의 소유욕을 자극했다. 조선의 흔한 흙으로 빚은 그릇이 일본에서는 성 한 채와 바꿀 정도의 귀한 대접을 받게 된 배경이다.실제로 일본 교토 다이도쿠치가 소장한 일본 국보 26호 '이도다완'은 조선의 이름 없는 도공이 만든 막사발이다. 조선의 생활용품이 일본의 국보가 된 이 아이러니한 상황은 임진왜란이 왜 '도자기 전쟁'으로 불리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히데요시는 침공 직후 조선의 유능한 도공들을 잡아오라는 칙령을 내릴 정도로 도자기 기술 확보에 집착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조선 도공이 일본으로 끌려갔고, 찬란했던 분청사기의 맥은 조선 땅에서 끊기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고흥 운암산 서쪽의 운대리 일대는 이러한 분청사기의 황금기를 증언하는 귀중한 유적지다. 이곳에는 청자와 분청사기 가마터 30여 개소가 밀집해 있어 고려에서 조선으로 이어지는 자기 변천사를 한눈에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유약에 그릇을 통째로 담갔다 빼는 '덤벙 분청사기'는 고흥 운대리에서 독보적인 예술적 경지에 올랐다. 꾸밈없는 순백의 미를 자랑하는 덤벙 분청사기는 조선 도자기 미학의 정점으로 평가받으며 오늘날까지도 많은 예술가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임진왜란이라는 거대한 소용돌이 속에서 조선의 분청사기는 한 나라의 국보가 되기도, 한 나라의 기술 단절을 가져오기도 했다. 고흥 운암산의 가마터는 그 찬란했던 예술혼과 전쟁의 상흔을 동시에 품은 채 오늘날 우리 곁에 남아 있다. 400여 년 전 일본 무사들이 성을 내주면서까지 갖고 싶어 했던 조선 막사발의 진정한 가치는, 비대칭의 투박함 속에 담긴 우리 민족의 소박하고도 강인한 생명력에 있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