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이슈

엄태정의 탈창조, 과학의 요람서 비움을 묻다

 첨단 과학기술의 요람인 카이스트(KAIST) 교정에 거친 쇠의 질감과 은빛 알루미늄의 사유가 스며든다. 카이스트 미술관은 오는 26일부터 한국 추상조각의 거목 엄태정 화백의 초대전 '탈(脫)창조의 세계로'를 개최한다. 이번 전시는 반평생 넘게 금속이라는 물질의 본질을 탐구해온 원로 조각가의 예술 세계를 총망라하는 대규모 기획전이다. 작가는 무언가를 끊임없이 생산해내는 기술 문명의 중심에서 오히려 비움과 성찰의 미학을 제시하며 관람객들에게 참된 인간성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전시가 열리는 장소인 카이스트 미술관은 고(故) 정문술 미래산업 회장의 숭고한 기부 정신이 깃든 곳이다. 정 회장이 기탁한 515억 원의 기부금과 41점의 미술품을 밑거름 삼아 2024년 말 문을 연 이 미술관은 과학과 예술의 만남을 상징하는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연면적 2,611㎡ 규모의 3층 건물에 마련된 7개의 전시실은 이제 엄태정의 손끝에서 탄생한 36점의 작품들로 채워진다. 특히 제1전시실인 '정문술홀'은 기부자의 뜻을 기리며 예술적 사유의 깊이를 더하는 핵심 공간으로 활용된다.

 


이번 초대전에 출품된 작품들은 1960년대 초기작부터 올해 완성된 신작까지 엄태정의 60년 필모그래피를 관통한다. 강렬한 에너지와 생명력을 뿜어내는 초기 철 조각들은 작가가 물질과 치열하게 대결했던 젊은 날의 초상을 보여준다. 이후 우주와 인간의 관계를 형상화한 연작을 거쳐, 최근의 알루미늄 작업에 이르기까지 작가의 시선은 점차 본질적인 비움으로 향한다. 야외에 설치된 '낯선 자의 출현' 연작은 캠퍼스를 오가는 이들에게 일상의 낯섦과 예술적 경이로움을 동시에 선사한다.

 

미술관 측은 이번 전시의 주제인 '탈(脫)창조'에 각별한 의미를 부여했다. 이는 단순히 새로운 것을 만드는 행위를 넘어, 기존의 관습과 욕망에서 벗어나 본연의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을 뜻한다. 기술 혁신이 가속화되는 카이스트라는 공간에서 역설적으로 '만들지 않음' 혹은 '비워냄'의 가치를 조명함으로써 과학도와 시민들에게 삶의 균형을 되찾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했다. 차가운 금속 소재가 작가의 철학을 만나 따뜻한 인간적 위로로 변모하는 과정이 전시 전반에 흐른다.

 


관람객들은 은빛으로 빛나는 알루미늄 조각 앞에서 시각적 평온함과 동시에 깊은 사유의 시간을 갖게 된다. 엄태정 조각가는 금속이라는 단단한 물질을 다루면서도 그 안에 담긴 정신적인 유연함을 잃지 않았다. 60여 년간 이어진 그의 작업은 결국 인간이 도달해야 할 궁극적인 평화와 질서에 대한 탐구였다. 이번 전시는 작가가 평생에 걸쳐 천착해온 물질의 언어가 어떻게 예술적 구원으로 승화되었는지를 확인하는 소중한 기회가 될 것으로 보인다.

 

카이스트 미술관의 이번 기획전은 2027년 6월 30일까지 약 10개월간 장기적으로 운영된다. 대학 캠퍼스 내 미술관이라는 특성을 살려 학생들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과 시민들을 위한 도슨트 투어도 병행될 예정이다. 과학의 논리와 예술의 감성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엄태정의 조각들은 우리 시대가 잃어버린 본질이 무엇인지 묵직한 울림으로 전한다. 거장의 손길이 닿은 쇠와 알루미늄은 이제 카이스트의 새로운 예술적 자산으로 남아 관람객들의 마음을 두드린다.

 

'왕과 사는 남자' 효과… 영월 청령포 인산인해

곳의 상흔 남은 터전들이 새로운 문화적 숨결을 얻어 부활하는 중이다. 수백 년 전의 역사적 비극을 간직한 공간들이 잊히지 않고 대중의 발길을 끌어모으는 역설적인 풍경이 펼쳐지는 모습이다.영화 '왕과 사는 남자'가 선풍적인 흥행 기록을 남긴 이후, 단종의 애달픈 서사가 서린 영월 청령포는 연일 몰려드는 관람객으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다. 상영이 완전히 끝난 이후에도 열기가 식지 않으면서 지역 상권과 숙박 시설은 이례적인 호황을 누리는 중이다. 한적했던 지방 소도시의 식당과 명소마다 대기 행렬이 이어지는 기현상이 일상으로 자리 잡았다.삼면이 강물로 둘러싸이고 뒤편은 가파른 절벽으로 막힌 청령포는 조선 6대 임금 단종이 유배 생활을 했던 천연의 고립지다. 숙부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17세의 어린 나이에 비극적인 생을 마감해야 했던 군주의 서글픈 역사는 자욱한 물안개 속 소나무 숲과 함께 서늘한 중압감으로 방문객을 맞이한다.울창한 소나무 숲 사이에는 단종이 기거했던 어소와 그 세월을 묵묵히 지켜본 관음송이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정통성을 지녔음에도 비운의 운명을 맞이해야 했던 단종의 삶은 오랫동안 풀어내지 못한 역사적 한으로 남아왔다. 천형과도 같았던 단절의 공간이 수백 년의 시간을 지나 대중과 호흡하는 장소로 변모한 셈이다.영화가 촉발한 역사의 재발견은 단순한 호기심을 넘어 미처 피어나지 못한 어린 영혼을 향한 애도와 추모의 발길로 승화되고 있다. 궂은 날씨 속에서도 청령포 선착장을 통해 강을 건너는 관광객들의 걸음은 끊이지 않는다. 과거 단절과 철폐의 대명사였던 유배지는 이제 안타까운 역사를 되새기고 위로를 나누는 열린 추모 공간으로 탈바꿈했다.쇠퇴해 가던 옛 광산촌과 역사적 유배지가 대중문화 콘텐츠와의 결합을 통해 지역 재생의 모범 사례로 거듭나고 있다. 비극적인 서사를 간직한 지역 유산들이 스토리텔링을 얻어 대중과 소통하면서, 멈춰 섰던 강원도 영월 일대의 시간은 새로운 활력과 함께 다시 흘러가기 시작했다.